하이데거의 피투성(被投性/Geworfenheit)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5. 5. 00:44

하이데거-피투성/기투

왜 나는 이런 세계에 살고 있는가

 

 

    소크라테스가 한 젊은이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질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전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질문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서 진리에 다다를 수가(의문을 제기할 수가)있을까?”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영혼이 천상의 이데아계에서 진리를 배웠지만 지상에서의 삶을 얻으면서 진리를 망각하게 되었으며, 그럼에도 진리를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대답했다(상기설).

    천상에 이데아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 우리 현대인에게, 소크라테스의 설명은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패러독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것일까.

    20세기 최대의 철학자 중 한 사람인 하이데거는 이런 패러독스에 답하는 형식으로 철학적으로 사색을 전개했다.

    하이데거는 1927년에 대표작인 『존재와 시간』을 발표했다. 책의 속표지에는 은사인 후설에게 바치는 헌사가 실려 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이 책은 하이데거가 후설을 비판한 책이다. 후설은 세계(대상)의 의미는 주관의 의식 속에 구성된 것이며, 그렇게 부여된 의미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인간의 의식 속에 이데아적인 영역이 확보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조작을 후설은 초월론적 환원이라고 불렀지만, 결국 의식 속에 이데아적인 것이 입력되어 있다고 생각한 후설의 사상은 충분한 근거가 결여되어 있다. 이런 설명은 이데아계가 소크라테스의 천상을 대신에서 의식 안으로 이동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 자체에 주목했다. 그리고 인간을, 후설의 경우처럼 세계(또는 그 의미)를 구성하는 순수의식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지도 만들지도 않은 세계에 자의(自意)와 상관없이 던져진 존재라고 지적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이런 상태를 하이데거는 ‘피투성(被投性/Geworfenheit)'이라 이름붙였다. 그리고 피투성은 기분(Stimmung), 그 중에서도 불안(Sorge)을 통해 자각된다. 예를 들면, 일상생활의 어느 순간 ‘왜 나는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을까’, 혹은 ‘머지않아 죽을 나에게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같은 불안을 내포한 물음은 누구에게나 살며시 다가온다. 그때 우리는 ‘왜 나는 여기에 존재하는가’라는 불안으로부터 자신이 이 세상에 던져졌고 여기에서 절대로 도망가지 못한다는 것(피투성)을 자각할 수밖에 없다.

    일단 피투성을 지각할 때, 인간은 언젠가 자신이 죽게 될 것이며 이 세계를 강제로 떠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죽음을 예리하게 의식하는 것을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선구적 각오성(覺悟性)’이라 불렀다. 이런 죽음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자신의 삶의 의미를 한번 포착해서 재구송하는 시도가 시작된다. 이런 시도는 ‘기투(企投/Entwurf)’라고 불린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세계 속에 자의와 상관없이 던져진 인간은 불안을 통해서 이런 상황을 지각하는 동시에 새로운 자신을 포착해내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작한다. 죽음의 자각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던져 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불안을 통해 피투성에 직면하지만, 역으로 이런 상황 때문에 최초로 존재와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여기서 처음의 소크라테서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앞서의 패러독스에 대해 하이데거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불안과 죽음의 자각을 통해서 진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답한 것이다.




출처 : Valis Deux 지음, 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사상,

개마고원 중 하이데거 부분 전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