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회와 문화>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읽고
그러니까 나는 제목에 완전히 낚였다. 이 책의 제목은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 아니라 지식인을 향한 ‘독설’이 되어야 맞을 거다. 작가는 이 책에서 ‘당신은 진정한 지식인인가? 당신이 지식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지식인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지식인이 아니다’라는 독설을 우리에게 퍼붓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은근하게 말하긴 했지만, 이 책의 제목은 명백한 반어다.
우리가 생각하는 지식인과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은 다르다. 일반적으로 지식인이라고 하면 가방 끈이 긴 사람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이란 지식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지식인이란 자기 자신 속에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 지배 이데올로기 사이에 벌어지는 대립을 깨닫고, 모든 권력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비판적 지식인이 우리나라에 몇이나 될까?
나는 책을 읽으면서 너무 놀랐다. 분명 이 책은 사르트르가 1965년에 한 강의 내용인데, 오늘 날 우리나라 사회를 너무나 잘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21세기를 미리 내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현재의 교육제도, 대학제도는 사르트르가 말한 그대로의 방법으로 지식인을 만들고 있다.
‘실천적인 지식인은 위로부터 모집된다.’ 맞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비추어보면, 대학은 기업이 원하는 인재들을 육성한다. 기업이 통계에 관한 전문가가 필요하다 하면 우리는 통계학을 필수교양으로 이수해야 한다. 돈이 되는 학문, 이공계통은 육성하고 케케묵은 인문학을 포기하도록 강요한다. 대학의 주인인 학생들에게 아주 쉽게 징계 처벌을 내리면서 ‘사람이 미래다’라는 뻔뻔한 광고를 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고객이 미래다’겠지.) 그런데도 공부 좀 했다 하는 대학생들은 그런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상부구조의 관리가 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나는 전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밑줄을 팍팍 쳐가면서 책을 읽었다. 나는 밑줄 옆에 내 전 남자친구 이름을 적었다. (물론 나의 이름도 적었다.) 전 남자친구는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결코 그가 지식인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을 것이다. 그는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일 뿐이었다. 그는 휴머니스트였다. 인간은 평등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는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이라며 나에게 “세상에 인문대학생만 남는다면 세계는 곧 멸망할 것이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게 해댔다. 참고로 그는 R.O.T.C.였다. 미군에 의한 베트남 침공을 진보,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하는 통에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그와 헤어졌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온전히 비판할 수 없다. 나 또한 그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도 어느 정도 중간층에 속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도움으로 대학을 와서 편하게 공부를 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럴싸한 직업을 얻어 중간계급에 속할 것이다. 창피한 일이지만 나는 이번 학기가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지 않았던가. 공무원 정도면 먹고 살 걱정은 없겠지. 시험에 통과해서 즐거워하는 나를 막연하게 상상하며……. 선생님께서 첫 수업 때 하신 말을 들으며 나는 혼자서 계속 웃었다. 정말로 노량진에서 슬리퍼 끌고 다닐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프티부르주아 계급에서 나오는 게 맞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정말 먹고 살기에 급급한 사람들은 깊게 공부하고 사고 할 여유가 없다. 이 책만 봐도 그렇다. 누가 이렇게 어려운 책을 읽겠어. 어느 정도 기본 지식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이 책을 소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굳이 이렇게 어렵게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것은 사르트르 고도의 전략이 아닌가 싶다. 지식인은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몸소 실천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과제가 아니었으면 나도 이 책을 꾸역꾸역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공부를 많이 했다고 지식인이 되는 것은 아니며, 이 어려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진짜 지식인이 되는 것도 아니란 것이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3장 때문이었다. 작가는 지식인인가? 나는 나의 위치가 어디쯤일까 궁금했다. 작가는 지식인이 맞겠지. 그럼 나도 지식인? 나는 제대로 뺨을 한 대 얻어맞았다. 결국엔 나는 지식인이 되려면 멀고도 멀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더라.
한때는 언어의 순수한 미만 다룬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것은 사회를 보려고 하지 않는, 사회문제를 볼 의지조차 없는 나의 비겁한 변명이었다. 내가 쓰는 언어가 이미 사회성을 가지고 있는데 순수한 언어의 미가 어디 있을까.
실제로 작가들이 늘어놓는 것들은 다 거짓말이다. 나는 대학에 와서 어떻게 하면 거짓말을 더 그럴싸하게 만들까 하는 방법들만 배웠다. 더 훌륭한 거짓말을 하기 위해 다른 거짓말쟁이들이 늘어놓는 것들을 읽고, 이 정도면 나도 훌륭한 거짓말쟁이지 하며 자위했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는 내내 죄책감이 들었다. 정작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아무 쓸모도 없는 일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작가란 ‘관찰자’, ‘방관자’다. 그래서 작가는 비겁하다. 나는 내내 내가 비겁하다는 생각만 했다.
결국 나는 자기만족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다. 그나마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글을 쓰는 일이니까. 하지만 정말로 내가 자기만족 때문에 글을 썼다면 일기만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일기를 쓰지 않고 소설을 쓴다. 나는 누군가 내 소설을 읽어주길 바란다. 내 거짓말을 읽고 그 거짓말을 읽을 동안만큼은 그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 소설을 다 읽은 후에 그들이 내 거짓말에 공감하기를, 소설을 읽기 전과는 뭔가 변했다고 느끼기를 바란다.
작가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주 뛰어난 거짓말쟁이다. 하지만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거짓말이 진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글을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쓴다는 행위가 적극적인 사회참여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글을 한 자 한 자 적는데 큰 책임감을 느낀다. 물론 나는 아직 작가도 아니고 지식인도 아니지만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정말 허투루 공부하면 안 되겠다. 스스로에게 창피하지 않은 대학생이 되어야겠다.
* 참고문헌
장 폴 사르트르, 박정태 옮김, 『지식인을 위한 변명』, 이학사,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