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켈만,『세계를 재다』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3. 12. 3. 21:45

 

  • 소설을 쓴다는 것은 고귀한 일 같아요. 미래를 위해 현재의 덧없는 순간을 붙잡아 두는 최선의 작업으로 보입니다. 아하, 그렇군요. 리히텐베르크가 말했다. 훔볼트는 얼굴이 빨개졌다. 제 말은, 요즘 유행하는 것처럼 작가가 이미 지나간 과거를 배경으로 선택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시도라는 것입니다. (pp.26~27)

 

  • 훔볼트는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벌거벗은 구릿빛 여자의 몸 위에 올라탄 봉플랑의 벌거벗은 등이 보였다. 그는 문을 닫고 배로 달려갔다. 뒤에서 봉플랑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셔츠는 어깨 위에, 바지는 팔에 걸친 채 숨을 헐떡이며 봉플랑이 용서를 구했을 때에도 그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훔볼트가 말했다. 다시 한 번 이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의 공동 작업은 끝난 것으로 알겠소. 봉플랑은 달리면서 셔츠를 입고는 헐떡이면서 말했다.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게 그렇게 이해해 주기 힘든 일인가요? 당신도 남자 아닙니까! 인간은 동물이 아니오. 훔볼트가 말했다. 가끔은 동물일 때도 있습니다. 봉플랑이 말했다. 훔볼트는 칸트를 읽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프랑스인들은 외국 사람이 쓴 책은 읽지 않습니다. (pp.47~48)

 

다니엘 켈만, 박계수 옮김, 『세계를 재다』,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