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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 중얼중얼
posted by 얄롱얄롱 2013. 12. 3. 13:26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고

 

 

1. 법이란 무엇인가

법률불소급의 원칙이란 것이 있다. 범죄의 성립과 처벌은 행위 시의 법률에만 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범죄가 성립되더라도 범죄가 일어났을 당시에 적법한 행동이었다면 소급하여 처벌할 수 없다.

이 원칙은 평상시에는 엄격히 지켜지지만 전쟁 같은 큰 사회 변동이 일어난 경우 배제될 때가 있다. 우리나라도 장면정부 당시 만든 반민족행위처벌법에서 소급처벌을 할 수 있게끔 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에 협력한 자들을 처벌하기 위해서였다. 독일 또한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특별형사법정을 창설하고 유대인 학살이라는 죄목으로 나치 전범들에게 사형이나 무기징역 선고를 내렸다. 나치에 의해 자행된 인권유린의 단죄를 위해서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소급입법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지만 역으로 이 소급법은 인권을 크게 침해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 헌법에서는 모든 국민은 행위 시의 법률에 의하여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행위로 소추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소급처벌로 인권을 보호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헌법에 위배되며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를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법이란 무엇인가. 법은 단순히 법전에 적혀있는 내용인가. 소급처벌의 예를 보면 법은 단순히 법전에 적혀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문법에 의하면 친일파나 나치는 처벌할 수 없는 대상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그들을 처벌했고 그것은 법이 아닌 그들의 도덕적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소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미하엘이 한나의 재판 의사록을 작성하는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그는 세미나에 참석한 학생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유죄판단을 내리는 것을 목격한다. 그들은 부모세대들이 하지 못한 과거청산을 자신들이 나서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치범들을 고발하는 분위기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법학생들은 법 보다 자신의 가치를 우선시하여 판단한다. 마치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물음과 비슷한 것이다. 그렇게 쉽게 가치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전쟁과는 무관한,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였기 때문이다.

 

2. 개인의 문제인가

사람은 자신과는 무관한 일일수록 쉽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세미나에 참석한 학생들이 실제 전쟁을 겪었다면 나치 친위대에게 그렇게 쉽게 유죄판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여전히 같은 태도였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로 전쟁과는 무관한 세대였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부모들로 인해 전쟁의 영향을 계속적으로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모 중 몇몇은 나치에 협조했고, 그 덕분에 자식들은 전후의 혼란스럽고 궁핍했던 시절 속에서도 무사히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이 과연 부모에게 유죄라는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

전후 68세대에게 과거청산은 표면적인 이유였으며, 사실은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부모와의 갈등이 원인이었다. 그들은 가차 없이 부모세대를 단죄하여, 세대 간에 선을 그었다. 그것이 부모 세대로부터 해방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 그렇게 부모세대를 단죄한다고 해서 그들이 과거의 시간과 역사와 무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스실로 수감자를 보낸 일에 대해 한나가 우리 모두가 동조했다는 말을 하자 재판장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 모두는이라고 말하는 게 내가나 혼자서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쉽죠, 그렇지 않습니까?” 재판장의 이 말은 돌려 말하면 우리의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너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문제해결에는 더 쉽다는 것이다. 판결을 내리는 데에 단호한 이 재판장도 한나에게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느냐는 질문을 받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세상에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면서 한나를 훈계한다. 수감자들이 갇혀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교회가 불에 타는 것을 방관했던 주민들 또한 마찬가지로 죄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나에게 죄를 씌웠다. 자신이 손가락질 받지 않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한나는 다른 죄인들의 죄까지 씌워져 가중처벌 받게 된다.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 희생시킨 한나가 이 재판에서는 오히려 희생자가 되어버린 꼴이다.

미하엘이 한나를 사랑한 것은 개인의 문제다. 하지만 한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미하엘은 재판을 마음 편히 볼 수 없었다. 결국 나치의 문제는 한나의 문제만이 아니라 미하엘의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개인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이다.

 

3. 사랑과 책임

물론 미하엘과 한나, 둘의 관계는 이상적 관계는 아니었다. 한나는 자신이 문맹인 것을 미하엘에게 숨겼고 그것으로 인해 미하엘과 완전한 소통을 할 수 없었다. 미하엘도 한나가 왜 화를 내는지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사랑이다. 하지만 미하엘에게도 한나와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아버지의 충고를 받아들여 형량 선고 전 한나와 이야기해서 그녀를 설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했더라도 수감 중에 한나에게 편지를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하엘은 그러지 않았다. 종국에 가서 한나와 몇 십 년 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자리에서 심지어 그는 한나에게 죄를 물었다. 그는 그가 비판했던 68세대와 똑같이 그녀를 단죄한 것이다. 결국 한나는 출소 전 자살을 하게 된다. 한나가 오랫동안 교도소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미하엘이 보내준 테이프 때문이었다. 미하엘이 책을 읽어 녹음해준 테이프는 한나와 미하엘을 연결해주는 끈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고 미하엘에게서까지 이해받지 못하자 한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미하엘은 한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 죄책감에서 헤어 나올 수 없던 그는 한나를 멀리함으로써 그 죄책감을 떨쳐버리려 했다. 하지만 회피한다고 해서 자신이 겪을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한나와 같이 벌을 받았어야 했다. 같이 아파하고 같이 책임을 졌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책임을 회피했고 한나를 배반했으며 그 결과 그의 삶 전체가 고통스러워졌다.

역사적인 문제는 그 시대를 살아온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의 고통은 현재로 대물림된다. 내 문제는 아니더라도 그 문제는 나의 부모의 문제일 수 있고 사랑하는 나의 연인의 문제일 수도 있다. 공동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책임감 있게 해결해 나가야만 한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김재혁 옮김, 『책 읽어주는 남자』, 시공사,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