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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5.05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최후의 세계』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최후의 세계』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5. 5. 01:02

 

  • 코타는 희미한 붉은빛을 띤 색 바랜 끄나풀을 살며시 끌어당겼다. 그 천 조각은 여러 돌 사이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그가 문자를 해독하려고 기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자 기둥 하나가 내려앉았다. 그 순간 소나무에서 뻗어 나온 뿌리 때문에 금이 간 계단을 따라 돌 조각들이 떼굴떼굴 굴러 내려갔다. 그가 깃발에서 읽은 글은 다음과 같았다. <어느 누구도 본래의 형태를 간직하지 못한다.>

  

  • 돌은 존재의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는 최후의 방법이라고……. 그녀의 이야기에서는 짐승들조차 화석이 되는 것이 존재의 혼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었다. (중략) 그녀는 오비디우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쩌면 그는 존재의 초라한 순간성을 뛰어넘는 현무암 기둥이나 돌로 변한 얼굴들이 주는 평온함과 영원함에서 위로를 얻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초월하는 돌이 아니라면, 또 연약하기 그지없는 생명체로부터 해방된 돌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물질이 침해할 수 없는 위엄과 지속성, 나아가 영원성을 약간이라도 보여 줄 것인가 하고 오비디우스가 지난 추수절 밤에 피네우스의 지하 술집에서 술 취한 좌중에게 물었다고 에코는 말했다. 물론 절벽도 풍화 작용에 의해 수천 년이 지나면 긁히고 부딪쳐서 가루가 될 것이며, 혹은 지구의 중심에서 뿜는 열에 의해 녹고 부서질 것이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바위도 유기체 세계의 어떤 형태처럼 다시 임의적인 모양을 이룬다. 하지만 절벽 아래의 음지나 동굴의 진흙 바닥에 평온하게 놓인 평범한 자갈은 어떤 제국과 정복자들보다도 더 오래 존속할 것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을. 제국의 궁전들은 황폐화되고, 왕조는 썩어 부패할 것이며, 황실의 영롱한 모자이크 바닥 장식은 집 높이만큼 쌓인 흙더미에 파묻힐 것이다. 그 흙더미에서는 엉겅퀴나 귀리마저 자라지 않을 것이다. 벌레와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구역질나고 악취 나는 유기체의 부패 과정에 비하면 화석의 운명은 얼마나 다행스럽고 또 인간의 품위에 어울리는 일인가. 이런 역겨움에 비하면 화석이 된다는 것은 오히려 구원이며, 언덕과 협곡과 황무지로 이루어진 낙원에 이르는 과정이다. 유성(流星)과 같은 인생의 영화는 무(無)에 불과하다. 돌의 위엄과 지속성만이 최고의 것이다…… 하고 오비디우스가 말했다고 한다. (pp.115~117 )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 『최후의 세계』, 열린책들,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