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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셸 바이어,『박쥐』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5. 5. 00:46

새벽녘의 정적을 가르며 목소리 하나가 터져 나온다.

"우선 안내 표지판을 세운다! 물렁한 땅을 골라 망치로 말뚝을 깊이 박아 넣는다! 있는 힘을 다해라! 표지판이 쓰러지면 안 된다!"

지휘관(여기서는 나치 친위대 또는 돌격대의 하급 직위로, 소집단의 통솔 책임자를 가리킴-역주)의 명령이 경기장에 울려 퍼진다. 완장을 두른 소년 몇 명이 지시에 따라 대열에서 달려나와 작업을 시작한다. 하나같이 귀 바로 위까지 깔끔하게 깎은 머리에 목 뒤를 면도해 짧은 털에선 윤이 난다. 참 짧게도 깎았다. 족보 있는 개들한테 하듯 꼬리나 귀 털을 잘라 다듬어 줄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완벽할 것이다. 요즘 노역에 동원되는 어린 소년들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휠체어가 다닐 수 있게 널빤지로 임시 도로를 만든다! 널빤지를 깔아 놓는 거다! 그렇게 해서 모든 장애자를 맨 앞줄까지 밀고 올 수 있게 한다! 비가 더 거세게 내려도 휠체어가 진창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한다!"

명령을 받고 있는 사람 외에는 꼼짝도 않고 서 있다. 축축하고 차가운 날씨지만 피로가 덜 깬 그림자들은 몸 한번 떨지 않고, 비에 젖은 갈색 제복 차림을 한 지휘관의 말 한마디 한마디와 일거수 일투족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여섯 명이서 널빤지 도로를 따라 석횟가루가 담긴 수레로 흰 선을 긋는다. 맹인을 인도해 주는 개들이 뒤로 물러선다. 선 사이 간격은 육십 센티미터. 사람 어깨 넓이 더하기 개 한 마리 넓이. 소름끼치게 정확하다.

지금은 전시(戰時)다.

 

  

마르셸 바이어,『박쥐』, 현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