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시보 효과 [ placebo effect ]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6. 26. 14:45

위약효과.

플라시보 효과란 약효가 전혀 없는 거짓약을 진짜 약으로 가장, 환자에게 복용토록 했을 때 환자의 병세가 호전되는 효과를 말한다.

'플라시보'란 말은 '마음에 들도록 한다'는 뜻의 라틴어로, 가짜약을 의미한다. 만성질환이나 심리상태에 영향을 받기 쉬운 질환에서는 이 플라시보를 투여해도 효과를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플라시보 효과'라 한다.

따라서 어떤 약품을 개발했을 때 임상효과가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플라시보를 이용한 검사를 반드시 거치도록 하고 있다. 가짜 약을 투여한 군과 진짜 약을 투여한 군을 비교, 확실한 유효성이 드러나야 된다는 말이다.

 

 

 

 

사진 아우라

페트라 켈리 Petra Kelly, 1947~1992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6. 17. 23:06





"한 여성이 능욕을 당하는 것과 지구가 능욕을 당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남근' 닮은 미사일을 만들어서 어떻게든 사용해 보려 하고...."



네이버 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8084

어슐러 르 귄, 『어둠의 왼손』서문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6. 13. 02:07

과학소설 SCIENCE FICTION은 때때로 좀 별난 소설로 취급되거나 심지어 아예 그렇고 그런 류의 소설로 정의된다. 과학소설가란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경향이나 현상들을 취해, 극적으로 각색해서 순화시키거나 강화시킨 다음 그것을 다시 미래로 확장시키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렇게 계속 가면 나중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예언이 만들어지며, 방법과 결과는 과학자들의 그것을 쏙 빼 닮는다. 특정한 약을 오랫동안 복용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예측하기 위해서 쥐에게 정제된 고단백질의 알약을 먹이듯이. 결과는 대부분 피할 수 없는 암으로 판명되고 만다.


좀 별난 과학소설들의 결과도 그렇다. 엄밀하게 말해서 과학소설의 소위 별난 작품들이 이른 결론은 정확히 로마클럽(지구의 유한성이라는 공통의 문제의식을 가진 세계 각국의 지식인으로 구성된 민간단체 : 옮긴이)이 도달한 것과 일치한다. 즉, 인간 자유의 점진적인 개화와 모든 지상 생물의 멸종 사이의 어디쯤.


이것은 과학소설을 읽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왜 그것을 ‘도피적인 것’으로 묘사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왜 그러느냐고 계속 질문을 하면 그들은 ‘너무도 비관적이기’ 때문에 과학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솔직히 시인한다. 무엇이든지 극한에 이르면, 설령 암에는 이르지 않는다고 해도 비관적인 상태에 이르게 마련이다.


다행히 그런 것들은 좀 별난 과학소설의 요소이긴 하지만 결코 게임의 이름은 아니다. 작가든 독자든 그들의 상상력을 만족시키려면 그것은 훨씬 더 합리적이어야 하고 또 그만큼 단순 명료해야 한다. 변수는 인생의 양념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좀 별난 그런 류의 소설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이 책을 읽고자 한다면 하나의 사고실험으로서 읽으면 된다. 메리 셀리MARY SHELLY의 경우처럼, 젊은 의사가 그의 실험실에서 인간을 창조한다고 해 보자.(‘프랑켄슈타인’을 말한다 : 옮긴이). 그리고 필립 K 딕 PHILIP K. DICK처럼, 연합군이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다고 해 보자.(‘높은 성의 사나이’를 말한다 : 옮긴이). 그리고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고 말해 보자. 그리고 일어나는 것을 보라.....


이들 소설 속에서 현대소설에 적합한 도덕적 복합성은 결코 희생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인위적인 죽음의 종말도 필요하지 않다. 사고와 직관은 실험의 제한된 경계 내에서도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더 크게 확장될 수도 있다.

슈뢰딩거와 다른 과학자들이 사용한 이른바 ‘사고실험’의 목적은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세계 즉, 현재의 세계를 기술하는 것이다(실제로 슈뢰딩거의 유명한 사고실험은 ‘미래’는 양적 수준에서 예언 ‘될 수 없다CANNOT’을 보여주었다.).

과학소설은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하는 것이다.


예언을 말하는 사람은 예언가들(책임이 없다)이거나 천리안을 가진 사람들(보통 적절한 대가를 치른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시대의 예언가들보다도 존경을 받았다), 또는 미래주의자들(대게 월급쟁이)이다. 예언은 예언가, 천리안을 가진 사람, 그리고 미래주의자의 일이지 소설가들의 소관이 아니다. 소설가들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허구와 거짓말이다.


기상대는 다음 화요일의 날씨가 어떨 거라고 말할 것이고, 랜드 사는 21세기는 어떻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런 정보에 관해서는 픽션작가에게 기대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것은 그들의 일이 아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기껏해야 그것이 어떻다느니, 또는 당신이 어떻다느니 하는 것이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봐야 지금은 날씨가 어떻고, 오늘은 어떻고, 또 현재의 이 순간은 어떻고, 비가 오고 해가 나고... 그러니 보라! 당신의 눈을 열고 귀 기울여 들어 보라! 이것이 소설가들이 하는 말이다. 그들은 당신에게 무엇을 듣고 보게 될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오직 그들 자신이 이 세계에서 보고 들은 것뿐이다. 그들은 자기 시간의 3분의 1은 잠과 꿈으로 보내며 나머지는 거짓말로 보낸다.


‘이 세계에 대한 진리!’ - 그렇다. 틀림없이 그렇다. 픽션작가들은, 적어도 그들이 보다 용감한 동안만큼은, 진리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말하고 싶어 하고 그것에 봉사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들은 좀 특별하고 이상한 방법을 통해서 그 일을 한다. 결코 존재하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을 소설 속의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을 만들어내서, 그것도 아주 상세하고 장황하게 감정을 불어넣어 이야기를 서술한다. 그리고 그들이 이 거짓말의 보따리를 다 풀어 놓았을 때, 그들은 으레 말한다. 여기에 있다! 이것이 진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거짓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온갖 종류의 사실들을 사용하는 수도 있다. 그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마셜 군도 수용소를 묘사할 수도 있고, 실제 전투가 있었던 보로디노의 전장을 그릴 수도 있으며,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세균배양 과정을 기술하거나 심리학 교과서에 씌어 있는 성격의 붕괴 과정 등을 설명할 수도 있다.


검증 가능한 장소, 사건, 현상, 행위의 무게가 독자들로 하여금 작가의 마음이 아니면 그 어느 곳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순전한 허구나 역사를 읽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제정신이 아니다 - 머리가 좀 이상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실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존재를 믿으며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이 보로디노에서 싸우는 것을 본다. 심지어 우리는 나폴레옹이 되기도 한다. 책장을 덮은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일찍이 어떤 존경할 만한 사회도 예술가를 신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는 너무도 어수선하고 혼란스럽다. 그런 까닭에 미래의 지향점을 찾는 과정에서 종종 예술가들을 예언가나 미래주의자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가 예술가는 미래를 내다보는 영감에 찬 예언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경이의 감정이 그들에게 일어날 수 없다거나 신이 그들을 통해서 보여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들을 예술가들이 믿지 않는다면 예술가란 도대체 뭘 하는 사람들인가? 자기 안에 있는 신이 자기의 혀와 손을 사용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이 아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도 그런 것은 그들의 생애에서 단 한 번 밖에 일어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번이면 충분하다.


그렇다고 오직 예술가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고 또 특권을 부여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과학자들 또한 예술가들과 마찬가지고, 영감을 위해 밤낮으로, 그리고 잠들었을 때나 깨어있을 때나 늘 그들의 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피타고라스가 알고 있는 것처럼, 신은 꿈속에서 말할 수도 있고 기하학적 형태로 말할 수도 있다. 또한 음악의 화음을 이용해 말할 수도 있고 순수한 사고의 교감으로 말할 수도 있으며, 언어로 말할 수도 있고 수의 형태로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골칫거리와 혼란을 만들어 내는 것은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만 말을 사용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일부 철학자들은, 언어란 논리적으로 언표되고 이념적으로 양화 될 때에만 합리적 지성인들에게 이해될 수 있다고 하면서, 말(문장, 진술)이 오직 한 가지 의미를 가질 때에만 가치를 갖는다는 자신들의 주장에 동조해 주길 바라고 있다.


빛의 신이며, 이성. 비율. 조화. 수의 신이기도 한 아폴로는 너무 가까운 곳에서 자기를 숭배하는 사람들의 눈을 멀게 했다. 똑바로 태양을 쳐다보지 말고, 약간 어두운 술집에 가서 디오니소스와 술을 마셔라! 언제든지!


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나는 무신론자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예술가이고, 그러므로 거짓말쟁이다. 내가 말하는 것을 믿지 말라. 나는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다.


내가 이해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논리적으로 말하면 ‘거짓말’이고,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상징’이며, 미학적으로 말하면 ‘비유’이다.


물론 체계과학이 그 웅장한 묵시록적 그래프를 보여주는 ‘미래학회의’에 초청 받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앞으로 2001년에 미국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언론에 말해 줄 것을 요구받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나는 과학소설을 쓰는 작가이지만 과학소설은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다. 나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며 당신과 비교해서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


이 책은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다. 물론, 이야기는 ‘에큐멘력 1490 - 1497년’을 무대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다고 당신이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겠는가?’ 게다가 그곳의 사람들은 남녀의 성구별이 없다. 즉 그곳 사람들은 남녀 동성이다. 그렇다고 내가 천 년쯤 뒤에 우리들은 모두 남녀 동성이 될 거라고 예언하는 것은 아니며, 또 우리 모두 저주받아 남녀동성이 되고 말 거라고 미리 알려주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단지 좀 특별하고 우회적이며 과학소설에 적합한 사고실험 방법을 가지고, 어느 시점에선가 당신이 우리를 보게 될 때 우리가 하고 있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단지 기술할 뿐이다. 소설가들이 하는 방법으로 정교한 상황적 거짓말을 만들어 내서, 심리적 실재의 어떤 측면을 기술할 뿐이다.


어떤 소설이든지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그 전부가 허구라는 것을 알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책을 읽는 동안만은 그 속에 모든 말을 믿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그 책이 훌륭한 작품이라면- 그 책을 읽기 전과 견주어 약간 달라졌다는 것을, 이전에 전혀 다녀 본 적이 없는 낯선 거리를 지나가다가 문득 새로운 얼굴들을 만난 것처럼 우리 자신이 변한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정확히 뭘 배웠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말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허구를 매개로 사용하는 예술가들은 이것을 ‘말로’ 한다. 말하자면 소설가들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다.


말이란 이와 같이 그것의 의미론적 쓰임새 외에도 그것이 갖고 잇는 상징적 또는 은유적 용법 때문에 역설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언어실증주의자들은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갖고 있지 않지만 말은 적어도 소리를 갖고 있다. 문장이나 단락은 음악의 화성이나 화음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주의 깊은 지성에 의해서보다는, 그것이 침묵 속에 낭독될지라도 예민한 귀의 소유자에 의해서 보다 명료하게 이해되는 것이다).


모든 허구는 ‘은유’이다. 과학소설은 은유이다. 이 과학소설을 고전적인 허구 형태와 달라 보이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현대생활의 골격을 이루는 어떤 거대한 지배체제-그 가운데는 과학, 즉 각 분야의 학문과 기술, 그리고 상대주의적이고 역사주의적인 관점 등이 있다- 로부터 도출된 새로운 은유들을 사용하는 것과 관계있지 않나 생각된다. 우주여행은 이 은유들 중의 하나이다. 대체역사도 그렇고, 대체생물학 또한 마찬가지이다. 미래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 그런 것 중에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허구화 된 미래란 그 자체가 곧 하나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은유한 것인가?


만일 내가 은유적으로 말하지 않을 수 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도 물론이다. 그리고 조금은 장엄한 투로, 이 소설의 주인공 겐리 아이가 나와 당신에게 진리란 상상의 문제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내 책상에 앉아 잉크와 타자기의 리본을 소모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 어슐러 K. 르 귄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 (Milgram Experiment, 1961)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5. 25. 13:22


밀그램 실험, E는 실험자(Experimenter), T는 교사(Teacher), L은 학생(Learner)이다.




밀그램 실험(영어: Milgram Experiment)은 1961년 예일 대학교의 심리학과 조교수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이 실시한 권위에 대한 복종에 대한 실험이다. 밀그램은 권위에 대한 복종에 대해 연구하던 중 사람들이 파괴적인 복종에 굴복하는 이유가 성격보다 상황에 있다고 믿고, 굉장히 설득력 있는 상황이 생기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윤리적, 도덕적인 규칙을 무시하고 명령에 따라 잔혹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밀그램은 "징벌에 의한 학습 효과"를 측정하는 실험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집하고 피실험자들을 교사와 학생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교사 역할과 학생 역할의 피실험자를 각각 1명씩 그룹을 지어 실험을 실시했다. 학생 역할의 피실험자를 의자에 묶고 양쪽에 전기 충격 장치를 연결했다.그리고 교사가 학생에게 문제를 내고 학생이 틀리면 교사가 학생에게 전기 충격을 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사실 학생 역할의 피실험자는 배우였으며, 전기 충격 장치도 가짜였다.

 



* 목표와 과정

사실 이 실험의 목적은 "징벌에 의한 학습 효과"가 아닌 "권위에 대한 복종"에 대한 실험이었다. 먼저 "징벌에 의한 학습 효과"에 대한 실험이라고 공고하여 4달러를 대가로 피실험자를 모은 뒤 각각 교사와 학생 역할로 나누었다. 그러나 사실 학생 역할의 피실험자는 배우였다. 실험자는 교사 역할의 피실험자에게는 학생에게 테스트할 문제를, 학생 역할의 배우에게는 암기할 단어를 제시했다. 그리고 교사에게 학생들을 테스트한 후 학생이 문제를 틀릴 때마다 15볼트부터 시작하여 450볼트까지 한번에 15볼트 씩의 전기 충격을 가하라고 지시했다. 밀그램이 주시했던 것은 교사들이 전압을 높여가는 과정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였다. 밀그램은 고작 4달러의 대가로 교사들이 과연 15볼트에서 450볼트까지 전압을 높일 것인지에 대해 관찰했다. 실험자는 흰색 가운을 입고 전압을 올릴지 말지 고민하는 교사들에게 '실험의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며 전압을 올릴 것을 강요했다.

 


* 실험의 결과

실험을 시작하기 전 밀그램은 4달러의 대가로 피실험자들이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밀그램은 0.1% 정도의 사람들이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험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65%의 피실험자가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렸다. 이 실험은 1971년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감옥 실험까지 확대되었다. 밀그램의 실험은 윤리적으로, 파시즘과 홀로코스트에 관련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밀그램은 피실험자들을 속이고 진행한 실험의 비윤리성으로 인해 대학에서 해고당했다.



 


더 웨이브

The Wave 
9.2
감독
데니스 간젤
출연
위르겐 포겔, 프레데릭 로, 막스 리멜트, 제니퍼 울리히, 크리스티아네 파울
정보
드라마, 스릴러 | 독일 | 107 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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