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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켈만,『세계를 재다』 / 중얼중얼
posted by 얄롱얄롱 2014. 1. 13. 10:47

 

 

1. 자연의 정복

알렉산더 폰 훔볼트(1769~1859), 그는 독일의 자연과학자이며 지리학자이다. 그는 중남미와 중앙아시아를 탐험하며 주변지리를 측량한 방대한 자료를 남겼다. 또 다른 인물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1777~1855), 그는 독일의 수학자이며 물리학자로서 19세기 최대의 수학자라고 일컬어진다.

다니엘 켈만은 이 두 실존 인물에 상상력을 더해 2005세계를 재다 Die Vermessung der Welt라는 역사소설을 발매했다. 역사 소설류의 팩션이 그렇듯이 이 소설 또한 두 인물의 행적을 따라가며 그들의 인생을 추적하는데 여기에 허구의 스토리를 더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두 인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주의 깊게 관찰하며 읽어야 할 점이다.

훔볼트는 뭐든지 측정하지 않고는 입에 가시가 돋는 인물이다. 그는 시중에 나와 있는 지도는 믿지 않으며 정확한 지도를 위해 가는 길마다 측정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측량한다.

 

훔볼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안 돼요. 유감스럽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높이를 알지 못하는 언덕은 이성에 굴욕감을 주며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p.41)

 

훔볼트의 이런 이성에 대한 믿음은 그가 계몽주의와 고전주의를 관통하는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인간이 이성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통제하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빛이라고요? 훔볼트가 말했다. 그것은 밝은 곳을 뜻하는 게 아니라 지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p.73)

 

이러한 지식에 대한 믿음과 연구 분야에 천착하는 집요함 덕분에 훔볼트는 유럽 역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되었다. 훔볼트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그를 멋진 위인으로만 그리고 있지 않다. 자연 위에 군림할 수 있다고 믿는 그 자신도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는 미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다. 모든 것을 다 측정해내겠다는 그의 포부도 발가락 피부에 파고들어간 벼룩과 사정없이 공격해대는 벌레들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해지고 만다.

훔볼트의 지식에 대한 믿음은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나아간다. 그는 정확한 지도가 식민지의 주거 지역 조성을 촉진할 수 있고 자연의 정복을 가속시키며 그 나라의 운명을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p.202) 그러나 훔볼트가 만든 지도는 구대륙의 신대륙에 대한 지배를 확장시키고 식민지 노예제도 형성을 가속화시켰을 뿐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지식을 인간의 우월한 점으로 인식하는 인간의 오만함을 비판한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법[각주:1]이다. 이에 따르면 훔볼트가 축적한 지식은 자연을 이용하는 지식, 그것은 순수한 학문이 아니라 도구적 학문이다. 켈만은 그것이 훔볼트의 한계, 나아가 계몽주의 한계라고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2. 숫자에 대한 믿음

가우스는 육체적인 것 보다 정신적인 것이 인간을 규정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는 방 안에만 틀어박혀 오직 머릿속 사고로만 대수학의 기본 정리들을 증명하고, 천체역학을 연구했다. 그러나 누구 보다 뛰어난 두뇌를 가진 가우스도 치통 앞에서는 무너지고 만다. 이 대단한 수학 천재도 숫자로 개념화되지 않은 추상적 감정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수학적 머리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고백을 할 때에는 유용하게 쓰이지 못하나 보다. 그는 요하나에게 사랑 고백을 하는 데 쩔쩔맨다. 첫 번째 부인과 일찍 사별하고 맞은 두 번째 부인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문적으로는 뛰어난 삶을 산 그도 가족을 부양하는 아버지의 역할은 잘 수행하지 못한다. 아들을 격려하고 싶지만 감정을 표현이 서툴러 오히려 뺨을 때리는 아버지인 것이다.

그런 점은 훔볼트도 비슷하다. 훔볼트에게 여자는 사랑과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측정의 대상이다. 그래서 봉플랑이 여자와 즐기는 사이에 그는 여자들 머리카락에 있는 이를 센다. 그가 봉플랑에게 화를 내는 이유는 훔볼트 자신이 육체적 욕구 표현에 서툴기 때문이다. 그런 그는 하나뿐인 형과도 사이가 좋지 못하다. 그는 형에게 쓰는 편지에 형제애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라고 언급한다.(p.33)

훔볼트가 믿는 유일한 것은 측정되어 숫자로 환원된 수치 결과다. 수의 완전성을 중요시한 가우스의 좌우명은 ()는 적으나 완숙하다였다. 그러나 그 두 명의 인물이 신성시했던 숫자, 과연 숫자는 객관적 산물인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숫자는 계몽의 경전이다[각주:2]라고 말한다. 계몽가들은 세계를 숫자로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계몽은 숫자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존재나 사건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훔볼트가 유령을 보고도 못 본 척 하며 보고서에 적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다. 유령뿐만이 아니라 훔볼트는 그가 본 것들을 모두 기록하지 않았다. 항해 중 그는 바다괴물을 만나지만 그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기로 한다. 재규어를 만났을 때에도 그는 사실과는 다르게 기록을 한다. 기록자에게 선택되어 임의적으로 기록된 수치는 객관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계몽주의뿐만이 아니라 작가는 소설 전반에 걸쳐 인간의 이성을 우선시했던 유럽의 사조들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고 있다. 비인간적인 전체주의, 현학적인 고전주의. 그러나 그 비판의 시각이 신랄하거나 날카롭지 않고 오히려 유쾌하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조만간 이 모든 것들이 하찮은 일이 될 것이다. 기구를 타고 떠다니고 자장의 지침반에서 거리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 측량 지점에서 다음 측량 지점까지 전기 신호를 보내 전기 강도가 떨어지는 정도를 보고 거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의 일들이 지금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이 일을 해야만 한다.”(p.197)

 

가우스는 미래를 예감하며 자신이 하는 일이 나중에는 하찮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은 지금 이 일을 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계몽주의의 의의다. 시대는 자체에 한계를 내포하고 있지만 그 시대가 있지 않았더라면 오늘날도 없다. 훔볼트, 가우스 각자의 방법으로 세계를 재려했던 그 인물들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우리도 없을 것이다.

 

 

다니엘 켈만, 박계수 옮김, 『세계를 재다』, 민음사

 

 

 

  1. Th.W.아도르노, M.호르크하이머 공저, 김유동 옮김,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 지성사, 2013, p.23 [본문으로]
  2. 위의 책, p.27 [본문으로]
다니엘 켈만,『세계를 재다』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3. 12. 3. 21:45

 

  • 소설을 쓴다는 것은 고귀한 일 같아요. 미래를 위해 현재의 덧없는 순간을 붙잡아 두는 최선의 작업으로 보입니다. 아하, 그렇군요. 리히텐베르크가 말했다. 훔볼트는 얼굴이 빨개졌다. 제 말은, 요즘 유행하는 것처럼 작가가 이미 지나간 과거를 배경으로 선택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시도라는 것입니다. (pp.26~27)

 

  • 훔볼트는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벌거벗은 구릿빛 여자의 몸 위에 올라탄 봉플랑의 벌거벗은 등이 보였다. 그는 문을 닫고 배로 달려갔다. 뒤에서 봉플랑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셔츠는 어깨 위에, 바지는 팔에 걸친 채 숨을 헐떡이며 봉플랑이 용서를 구했을 때에도 그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훔볼트가 말했다. 다시 한 번 이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의 공동 작업은 끝난 것으로 알겠소. 봉플랑은 달리면서 셔츠를 입고는 헐떡이면서 말했다.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게 그렇게 이해해 주기 힘든 일인가요? 당신도 남자 아닙니까! 인간은 동물이 아니오. 훔볼트가 말했다. 가끔은 동물일 때도 있습니다. 봉플랑이 말했다. 훔볼트는 칸트를 읽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프랑스인들은 외국 사람이 쓴 책은 읽지 않습니다. (pp.47~48)

 

다니엘 켈만, 박계수 옮김, 『세계를 재다』,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