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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5.05 자크 데리다
  2. 2012.05.05 롤랑 바르트,『텍스트의 즐거움』 1
자크 데리다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5. 5. 00:33

자크 데리다 [ Jacques Derrida ]

 

 

1930∼2004.10.08


프랑스 철학자. 알제리 앨비아르 출생. 해체철학의 대표적인 철학자.


1930년 알제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성장했다.어머니가 아랍계 토착 유대인이어서 2차 세계대전 중의 나치 정권 아래 퇴학 조치를 비롯한 여러 인종 차별을 경험했다.


프랑스에서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철학과를 졸업하고 60∼64년 소르본대학, 65년 이후에는 모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1983년 국제철학학교를 창설,초대 교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철학과 주임교수로 재직중이다.


데리다는 70년대 이후 현실문제에도 적극 참여, 1979년 6월 소르본 대학에서 1200여 명의 지식인이 모여 교육과정 개편에 항의하는 '철학삼부회의'에서 그는 ""이 나라에서 철학 영역이 제한 받는다면 비판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 그만큼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역설했다. 


1980년 폴란드의 위기가 최고조일 때, 체코의 프라하에서 77현장 멤버들과 접촉하다 체포되어 48시간 동안 구금된 적도 있다. 만델라 구명운동과 '반 아파르트헤이트'전도 기획했다. 


예술가들과도 교류해 미국 건축가 피터 아이스만과 함께 공원을 설계하고,비디오아티스트 게리 힐의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다.90년대 들어서는 <마르크스의 유령> 등 기아,인종주의, 핵문제 같은 현실문제에 대한 저서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데리다의 철학은 '해체(解體:Deconstruction)'와 '차연(差延:differance)'이란 개념으로 유명하다.


데리다는 서양철학이 대부분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확실성이나 의미의 근원을 모색해 왔음을 비판, 어떤 확립된 철학이론을 갖는 것을 피하고 언어의 기호체계가 자의적인 것이라는 인식 아래 해체의 방법을 통해 언어를 분석, 서양철학의 기본개념을 재검토하려 하였다. 


또한 '차연'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는데, '차연'은 '다르다'와 '연기하다'라는 말의 합성어이다. 즉 어떤 단어의 의미라는 것은 한 단어(기표)에서 다른 단어(기표)로의 이동에 지나지 않으며 존재하는 동시에 그 실체는 허상인 것이다. 또한 한 단어의 의미는 다른 개념과의 대비('상호텍스트적 의미')속에서 비로소 생성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요소의 개념이나 의미보다 그 요소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요소들과의 차이와 접목의 맥락을 파악함이 더 중요하다.


저서로 <글쓰기와 차이>, <목소리와 현상>, <그라마톨로지>, <산종>, <철학의 여백> 등이 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철학 뿐 아니라 문학, 건축, 시각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까지 확산되고 있다.

롤랑 바르트,『텍스트의 즐거움』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5. 5. 00:12

<역자 서문>

 

바르뜨는 텍스트(Text)를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읽혀지는"(lisible) 텍스트와 "쓰여지는"(scriptible) 텍스트.

 

현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용어를 사용하여, 첫번째 종류의 텍스트는 "소비되어지는 것"으로, 독자가 책을 읽는 동안 아무런 충격 없이 언어를 소비하여 "버리는" 소위 인스턴트 텍스트를 이른다. 그러나 두번째 텍스트에서 독자는 읽어 가는 동안 단속적인 충격을 지속적으로 받음으로 독서 방법에 있어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의 방법을 거부하게 된다. 이 때 발생하는 틈 사이를 독자 자신의 텍스트로 "재생산해 내는" 반성적인(reflexive) 텍스트가 생겨난다.

 

부연하여, 이 "쓰여짐"의 텍스트는 독자 자신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텍스트를 유도하는데, 이 때 독자는 독서 시간의 흐름을 단속적으로 잘라 내어 그 틈 사이에서 그 텍스트와 독자는 수직적인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

 

 

독자 ─────────>         독자 ------------------->

                                                    │ │ │ │ │ │

텍스트 ────────>         텍스트 ---------------->

    "읽혀지는" 텍스트                       "쓰여지는" 텍스트

 

 

이처럼 "쓰여지는" 텍스트란 독서시간을 단속적으로 분할하여, 수직적으로 단절시키는 힘을 가진다 - 바르뜨는 Image, Music, Text에서 이 "읽혀지는" 텍스트를 "작품"(Work)으로 그리고 "쓰여지는" 텍스트를 "텍스트"(Text)로 구분하고 있다.

 

본문의 "청취"의 장에서 바르뜨는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수직적인 독서방법에 대하여 매우 흥미있는 발언을 하고 있다 : "만일 텍스트 그 자체가 간접적으로 들리도록 유도되어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서 최상의 즐거움을 산출해 내게 된다; 만일 그것을 읽는 동안, 내가 자주 위를 쳐다보고, 그 밖에 어떤 곳에 귀를 기울인다면 말이다" 독서를 한다는 것은 읽어서 소비하는 것 말고("읽혀지는"텍스트), 독자 자신이 직접 텍스트에 참여하여 텍스트를 써 나가는 방법이 있다("쓰여지는" 텍스트). "내가 독자를 만들어 내겠다"고 단언하고 나선 버나드 쇼우 경우처럼, 텍스트는 소비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독자가 만들어 내는 것을 이른다.

 

생략........

 

 

 

"내가 신을 본 그 눈은 신이 나를 본 그 눈과 똑같다." -

에인젤루스 실레시우스

 

 

 

 

<해설>

텍스트의 즐거움

- 롤랑 바르뜨(Roland Barthes)의 죽음 -

 

롤랑 바르뜨는 1915년 11월 12일 쉘부르(Cherbourg)에서 태어나 파리대학에서 불란서 문학과 고전을 공부했다. 루마니아와 이집트의 대학들에서 불어를 가르쳐고, 후에 그는 과학연구국립 연구소(Centre National de Recherche Scientifigue)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사회과학 어의학의 연구에 전념했다. 1980년 3월 26일 죽을 때까지 그는 프랑스대학(College de France)의 교수로 있었다.

 

"바르뜨는, 소르본(Sorbonne) 앞에 있는 에꼴가(rue des Ecoles)에 있는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세탁운반물차에 치어 죽었다. 그는 철학가 미셀 푸코(Michel Foucault)와 당시 사회주의 반대파의 지도자 프랑소아 미테랑(Francois Mitterand)과 함께 막 점심식사를 마친 후였다. 그 사고는 3월 25일 일어났는데, 만일 그가 그해 초 그의 어머니 앙리에뜨 바르뜨(Heriette Barthes)의 죽음에서 시작된 극심한 우울증에 빠지지 않았던들, 그는 그의 상처로부터 살아 남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1973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그의 작품들의 비평적 독자들이 오랫동안 의아했던 사실을 인정하는 말을 했다 : 살해할 라이우스(Laius)를 갖지 않은 오이디푸스(Oedipus)는 라이우스를 발명해 내야 한다 : 그리고 바르뜨의 경우 그의 라이우스는 그가 Doxa라 부르는 것으로, 이는 그가 부르조아를 특징 지우는, 인정되어 이미 기성화된 의견이나, 상투적인 고정관념들로, 일련의 숨막히게 하는 것들을 이른다.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이 가지는 이미지는, 하나의 점이 또 다른 고정된 점으로 이동하여 하나의 직선으로 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쉽게 시각적으로 파악이 가능하며, 또한 기록 가능한 것이다. 위 인용에서 우리는 다섯 사람의 죽음을 본다. 바르뜨의 아버지, 어머니, 바르뜨, 그리고 라이우스와 오이디푸스. 이 중에서 오이디푸스와 라이우스는 신화적 문맥에서 하나의 은유(metaphor)로써, 심리학적으로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제우스가 그의 아버지 타이탄을 살해하고 그의 왕국을 건설하듯이, 오이디푸스는 그의 아버지 라이우스를 살해하고 자신의 왕국을 통치하게 된다. "아버지"가 심리분석에서 가지는 의미는 그것이 가지는 오래되고 낡아 새로운 충격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고, 그 아들은 새로운 충격으로 그 아버지를 살해해야 할 의무를 지니게 된다. 이 의무감을 Harold Bloom은 Anxiety of Influence라고 불렀다. 선배들에 대하여 후배는 항상 전복적이고 아니면 적어도 그가 손대지 못한 부분을 완성해야 되는 짐을 가지게 된다. 쉽게 우리는 이런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글을 쓸 때 사용하게 된다. 우리는 이미 선배가 쌓아 놓은 지금까지의 업적들을 살펴보아야하고 미진한 곳을 보완하고 잘못된 곳을 고치고, 그리고 선배가 쌓아 놓은 업적들을 송두리째 바닥부터 흔들어 놓으려는 충동을 가지게 된다.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다 아는 것을 쓴다면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쓴다는 그 자체에 어떤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하게 된다. 새롭게 쓰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선배의 글을 읽게 될 것이고 그들의 약점을 찾아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배의 키가 커서 그 그림자가 길고 넓게 가리워져 있으면, 우리는 그 속에서 빠져 나오기에 수백 날의 세월을 소비했음을 영문학사에서 찾아보게 된다. 쵸오서가 그랬고 셰익스피어가 그랬으며 밀튼의 그림자가 그러했다. 우리는 유럽의 낭만주의가 셰익스피어의 새로운 연구에서 시작되었음을 안다. 셰익스피어는 낭만주의가 살해해야 할 라이우스였다.

바르뜨가 그의 라이우스로 여겼던 부르조아의 안정되어 변화를 거부하는 "Doxa"란 이미 마르크스가 거부했고, 사르트르가 총격을 가했던 낡은 노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그 노인에게 계속해서 재생산해내어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들"을 계속해서 복사해 놓았다. 심지어 신화 비평은 이 아버지를 숭배하는 입장을 고수했으며, 현대 비평은 오이디푸스들을 계속해서 복사해 놓아야했다. 우리는 오이디프스들을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여러 가지 모습에서 보게 된다. 여성학 비평, 마르크스주의 비평, 해체주의 등등 바르뜨 역시 하나의 오이디푸스로서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탈바꿈한 인물중 하나이다.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그의 De La Grammatologie(Paris:Edition de Minuit, 1967)라는 책을 썼다. 제목이 뜯하는 grammar of writing이 시사하듯이,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관심은 간단히 말해 "작문"(wrting)의 생산성(productivity)이 무엇이냐 하는 점에 집중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푸코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보자.

 

This play of transgression and being is fundamental for the constitution of philosophical language, which reproduces and undoubtedly produces it.

이곳에서 "being"이란 데리다가 말하는 "presence"이고, 바르뜨가 이야기하는 "doxa"이다. 그것은 아무런 존재 이유 없이 인정되고 사용하는 관념이며, transgression은 데리다가 말하는 "difference"이고 바르뜨의 오이디푸스이다. 이처럼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작문"(writing)의 "문법"(grammar)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나는 바르뜨의 죽음에 대하여 필립 쏘디(Philip Thody)의 글 중에서 인용한 부분이 있다. 첫 문장에서 Thody는 바르뜨가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세탁운반차에 치여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두번째 문장에서 유명한 두 인물 Michel Foucault와 Francois Mitterand을 들어 그가 죽기 전 그들과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서 바르뜨 어머니의 죽음과 바르뜨의 우울증, 그리고 그의 죽음의 원인은 그 교통사고 보다는 그의 우울증에 대하여 더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문장을 바꾸어 그가 죽은 달에 출판된 책 La Chambre Claire : Note sur la Photographie(Cahiers du Cinema, Gallimard, Seuil)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책에서 바르뜨는 그의 어머니가 그의 삶에 차지하고 있는 정서적 중요성에 대하여 쓰고 있다: "텍스트의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그런 텍스트에는 "진지한 것"과 "부질없는 것이"함께 한다고 바르뜨는 말했다. 바르뜨의 죽음과 세탁운반차. 그 얼마나 바르뜨다운 죽음인가? Foucault와 Aids 만큼이나 말이다. 일생 동안 바르뜨는 "작문"(writing)의 taboo에 대하여 싸워 왔다. 그러나 Thody는 철저하게 그 taboo를 깨뜨리고 싶지 않은 것인가? sexuality의 역사를 3부작이나 쓴 Foucault가 Aids 때문에 죽었다는 것은 얼마나 작문의 taboo를 깨뜨리는 "텍스트의 즐거움"을 우리에게 안겨 주는가? (ㅋㅋ) 오히려 바르뜨가 담배값이 없어 담배집 주인과 싸우고 나서 사고가 났다면? 바르뜨의 죽음의 텍스트에서 즐거움은 두 명의 유명한 인물과 점심 식사에서 반감하고, 그의 우울증에 대하여 언급할 때 우리는 그 혐오감 나는 심리분석에서 풍기는 젊잖은 그 말투에서 다시 한번 토라져 버리고 만다. 마치 바르뜨는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됐다는 말인가? 죽음은 이처럼, 가볍고 부질없어서는 안 됐다는 식으로, 바르뜨 자신이 그의 죽음에 대한 이런 텍스트를 보았다면 어떻게 분석을 했을까?

바르뜨가 프랑스대학의 교수직에 오른 것은 그의 나이가 매우 들어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형식에 맞추어 주를 단 논문들을 쓴 것이 별로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주 없는 글. 그의 죽음은 결국 주 없는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즐거움의 텍스트" 그것이었다.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