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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2.03 카프카,「첫 번째 시련」
  2. 2012.05.05 토마스 만,『토니오 크뢰거』
카프카,「첫 번째 시련」 / 중얼중얼
posted by 얄롱얄롱 2013. 12. 3. 13:24

카프카의 첫 번째 시련

 

 

1. 땅에 발붙일 수 없는 예술가

예술가란 땅에 내려오지 못하고 낮이나 밤이나 그네 위에 머물러야 하는 곡예사 같은 존재다. 반면에 예술을 그저 취미로만 즐기거나 아니면 예술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들은 땅에 발붙여서 살아간다. 그들은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잠을 자러 우르르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는 와중에도 예술가는 그네 위에 홀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예술가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왜 즐거워하는지 또는 무엇 때문에 아파하는지 항상 지켜보아야하는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땅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없는 존재다.

 

2. 곡예사는 왜 울었을까

소설 속 곡예사는 삶과는 유리된 채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 세계에서 곡예사는 자신의 예술에만 전념한다. 하지만 곡예사는 자주 흥행주를 따라 공연을 하러 다녀야 했고, 땅으로 내려와 삶과 부딪혀야 하는 여행을 할 때 마다 고통을 느꼈다. 어느 날 곡예사는 여행 중에 흥행주에게 부탁을 한다. 이제 자신은 한 개의 그네만 타지 않겠다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그네를 가져야겠다고. 흥행주는 흔쾌히 두 개의 그네를 준비해 주겠다고 말을 한다. 그러자 곡예사는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그는 무엇 때문에 울음을 터트린 것일까?

천장 높은 곳에서 하나의 그네를 타는 것조차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힘든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동시에 두 개의 그네를 타는 것은 어떨까.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고 뼈를 깎는 고통을 인내해야만 할 것이다. 그럼에도 곡예사는 더 이상 한 개의 그네에 만족할 수 없었다. 이것은 예술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그의 성격 때문이다. 곡예사는 앞으로 자신이 겪어야 할 고통스러운 미래를 감지했던 것 같다. 자신은 두 개의 그네를 타야만 하고, 갖은 노력 끝에 두 개의 그네에 익숙해지더라도 그의 예술적 욕망은 세 개의 그네를 원할 것이다. 그네 타는 기술을 모두 익힌다 하더라도 곡예사는 그네에서 내려올 수 없다. 기술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 곡예사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절대로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을, 그네에서 영원히 내려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곡예사의 울음은 탄생의 울음이라고 할 수 있다. 태아가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크게 우는 것처럼 말이다. 태아는 출산 전 산모와 일체의 상태로 자란다. 곡예사가 한 개의 그네를 가지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았듯이. 태아는 성숙해지면 자궁을 뚫고 나오게 된다. 태아는 엄마의 산도를 따라 밀려 나오는데, 이때 태아는 온몸이 수축되기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던 태아에게 바깥세상의 충격은 엄청난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탄생은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성스럽거나 긍정적인 의미의 탄생이 아니다. 태아에게 탄생은 어쩌면 고통의 시작일 것이다. 자의적으로가 아니라 타의적으로 세상에 나와야하고 성장을 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곡예사 또한 그네 위에서의 삶을 자신의 의지로만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성격 때문에 그네를 타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고, 하나의 그네에는 만족할 수 없어 더 많은 그네를 타며 끝없는 성장을 해야만 한다. 이것을 처음 인식하게 된 곡예사는 태아처럼 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곡예사의 본심

그의 울음은 또한 복합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었다. 곡예사는 흥행주가 자신을 위해 그네를 준비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을 말려주길 바랐을 것이다. 한 개의 그네를 타는 것도 힘든 일이니 두 개의 그네는 생각도 하지 말라고 화를 내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흥행주는 곡예사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꼼짝없이 곡예사는 두 개의 그네를 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흥행주도 곡예사의 고통스런 앞날에 대해 알고 있었다. 곡예사가 그네 숫자를 계속 높이지는 않을지 그것이 곡예사의 존재를 위협하지는 않을지 걱정한다. 그리고 잠든 곡예사에게서 첫 주름살이 지기 시작한 것을 본다. 이 주름살은 곡예사가 예술의 완벽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처음 인식함을 뜻한다. 또한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기술을 연마하게 될 곡예사의 예술세계가 성숙해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주름은 관록의 상징이라고도 이야기하지 않는가. 자신이 완벽을 추구해야하는 예술가임을 인식하고 그 고통을 감내해내는 예술가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습관 때문에 예술을 추구하던 예술가 보다 한 차원 높은 예술가인 것이다.

 

 

토마스 만,『토니오 크뢰거』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5. 5. 01:01

 

 

  • 그러나 비록 그가 닫혀진 덧창 앞에 외로이, 국외자의 신세가 되어 희망도 없이 서서는 상심한 나머지 마치 창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척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복했다. 왜냐하면 그때 그의 심장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왜냐하면 행복이란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자신에게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사랑받는 것, 그것은 허영심을 채우려는, 구역질나는 만족감에 다름아니다. 행복은 사랑하는 것이다.

 


  • 관능에 대한 구역질나는 증오와 순수성과 단정한 평화를 향한 갈구가 그를 사로잡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비밀스런 생산의 환희 속에서 준동하고 괴고 눈뜨는 상춘(常春)의 미지근하고도 들척지근하며 향기를 머금은 공기, 예술의 공기를 호흡해야 했다.

 

  •  <봄은 가장 추악한 계절입니다.>하고 말하면서 그는 카페로 가버렸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야 하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실은 봄에는 저 자신도 신경질적으로 됩니다. 저 자신도 봄이 일깨워주는 갖가지 추억과 감정의 아름다운 비속성 때문에 혼란에 빠진답니다. 단지 저는 그 때문에 감히 봄을 욕하고 능멸할 수가 없을 따름입니다. ……(중략)…… 예술가가 인간이 되고 느끼기 시작하면 그는 끝장입니다. 이것을 아달베르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카페로, 그런 <동떨어진 영역>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예, 바로 그겁니다!

 

 

  • 문학이란 것은 소명이 아니라, 일종의 저주다.

 

 

  • 이제 <언어>에 대해 말하자면, 이것이 인간을 구원해 준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감정을 차갑게 만들고 우리 인간의 마음을 얼음 위에 갖다 놓는 것이나 아닐까요? 농담이 아닙니다. 우리의 감정을 문학적 언어를 통해 신속하고도 피상적으로 처리해 버리는 데에는 그 어떤 얼음처럼 냉혹한, 분개할 만큼 외람된 행태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당신이 어떤 감미로운, 또는 숭고한 체험에 의해 너무나 큰 감동을 느꼈다고 칩시다. 더 이상 간단한 일이 없지요! 글쟁이한테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정리되어 나옵니다. 그는 당신을 위해 당신의 일을 분석하고 공식화하여 기존 개념으로 명명(命名)한 다음, 표현을 하고 일 자체가 저절로 말하도록 해줄 것이고, 그 모든 문제를 영원히 처리하여 아무 관심도 가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주고는 고맙다는 인사말조차 필요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할 것입니다. … 냉혹하고도 허영심에 찬 사기꾼…한번 말로 표현된 것은 이미 처리된 것이다.-이것이 그의(예술가)의 신조입니다. ……(중략)…… 고맙습니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이제는 안심하고 집으로 갈 수 있습니다. 나는 <처리되어> 버렸으니까요.

(대박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우리 예술가들은 누구보다도 딜레탕트를 가장 근원적으로 경멸합니다.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민음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