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역할이란?" 까뮈, <예술가와 그의 시대> /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3. 1. 22. 15:18

 

예술가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는 의문, 즉 ‘예술은 허위적 사치인가?’라는 의문을 풀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대답은, 결국 예술은 허위적 사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도형수들이 노를 젓고 선창에서 기진맥진하는 동안 노예선의 제일 뒤 갑판에 앉아서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들은 희생자들이 사자의 이빨 밑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동안, 이 곡예장 위에서 끊임없이 주고받는 세속적인 대화를 기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위대한 성공을 거둔 그 예술에 대하여 뭐라고 비난하기도 지극히 곤란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했으므로 여러 가지가 좀 변했고, 또 특히 도형수와 순난자(殉難者)들의 수가 지구 표면 위에 놀랍게 증가한 것입니다. 이 많은 비참 앞에서도 예술이 계속하여 하나의 사치가 되고자 한다면 오늘도 역시 하나의 허위를 승낙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술은 대체 무엇에 관해서 말하겠습니까? 만일 예술이 우리 사회의 대다수 사람이 요구하는 것에 순응한다면 예술은 무제한의 오락이 될 것입니다. 만일 예술이 맹목적으로 대다수 사람을 거부하고 자기의 꿈 속에 고립되기로 결심한다면, 하나의 거부밖에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오락인들의, 혹은 형태에 대한 문법가들의 생산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살아 있는 현실과는 단절된 예술에 귀착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중상을 입고 있는 가치는 분명히 자유의 가치입니다. 어느 훌륭한 정신의 소유자들(저는 지성에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지적 지성이요, 다른 하나는 어리석은 지성입니다.)은 자유의 가치는 참된 진보의 과정에서는 하나의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렇게도 장엄한 우매함이 야기될 수 있었던 것은, 백 년간 자본주의 사회가 자유를 극도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이용하였고, 그 자유를 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권리로서 간주하였고, 또 될 수 있는 한 번번이 자유의 원칙을, 사실을 억압하는 데 거침없이 이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회가 예술에게 자유의 도구가 되기를 요구하지 않고, 큰 효과 없는 훈련이나 단순한 여흥이 되기를 요구했다고 해도 전혀 놀랄 것이 못되지 않겠습니까?

- 까뮈, <예술가와 그의 시대> 중에서

 

 

 

비지식, 체험의 양식 위에서 전체를 보고하지 않는 작품으로서 가치 있는 작품은 없다. 전체란 완전히 인식되지 않은 채 체험된 것으로서의 사회적 과거와 역사적 제반 상황인 것이다. 그것은 개체는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객관적 구조들에 소속되어 있는 비의미 작용의 특수화로서만 나타날 수 있으며, 반대로 목표된 준의미 작용들은 그것들이 특수한 근원에 근거하여 체험된 것으로서만 구체적으로 나타날 때, 오직 그때만 사회의 객관적 구조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객관적 보편은 개체성에서 태어나 개체성을 부인하면서 보존하는 보편화의 노력의 지평선상에 있다.

그것은 한편에 있어서 작품은 그 시대 전체를, 즉 사회 내에서의 작가의 상황에 대답하여야 하며, 이러한 개체적 삽입에서 출발하여, 이 삽입이 작가를―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그의 존재 속에서 구체적으로 문제시하며, 그의 소리·사물화·욕구 불만·충족의 의심스런 토대 위에서의 고립의 부족 등의 형식하에 그의 삽입을 사는 존재로 만드는 것으로서 사회적 세계 전체에 대답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전체화 자체는 진행 중인 전체화의 단순한 계기로서 역사적으로 특수화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작가가 한 세계 내의 존재라는 형식하에 그의 세계 내 존재를 살지 않는 것, 즉 이 세계의 갈등들, 예를 들어 핵무장과 인민 전쟁 등 인류를 궁극적으로 파괴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사회주의에로 나아갈 가능성 등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무지와 무능력, 불안 상태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은 원자탄과 우주 탐험의 세계를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작가는 누구나 이 세계가 아닌 추상적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농담가나 협잡꾼일 뿐이다.

이 제반 상황 속에서 그 자신의 삽입을 보고하는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 매 페이지마다 이어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뇌가 폭탄의 존재를 드러내 주기만 하면 되지, 폭탄에 대해 말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반대로 전체화는 비지식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삶은 모든 것의 기초이며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것에 대한 궁극적 부정이다. 따라서 전체화는 수동적으로는 내재화되어지지 않으며 삶이라는 유일한 중요성의 관점에서 포착되는 것이다.

문학 작품의 기초를 이루는 양가성은 말로(Malraux)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 의해 잘 표명되고 있다.

“삶은 아무 가치가 없다. 그러나 어떠한 것도 삶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이 말은 무차별하게 각각의 삶을 생산하고 짓밟는 배후 세계의 관점과 죽음에 대항하여 자신을 투기하며 자신의 자율성 속에서 스스로를 확립시켜 가는 개체성의 관점을 결합시키고 있다. 작가의 참여는 공통 언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비정보 부분을 개발하여, 전달할 수 없는 것, 즉 체험된 세계 내 존재를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전체와 부분, 전체성과 전체화, 세계와 그의 작품의 의미로서의 세계 내 존재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는 데 있다.

그는 ‘그의 직업 자체 속에서’ 특수와 보편 사이의 갈등과 싸우고 있다. 다른 지식인들이 그들 직업의 보편주의적 요구들과 지배 계급의 특수주의적 요구들 사이의 갈등에서 그들의 기능이 생겨나는 것을 본 반면에, 작가는 그의 내적 작업 속에서 지평선상의 삶의 확인으로서의 보편화를 시사하면서 체험의 차원에 머물러야 하는 의무가 있음을 발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는 다른 지식인들처럼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지식인인 것이다. 정확히 이 이유 때문에 작품 그 자체가 이미 작가로 하여금 다른 지식인들이 서 있는 이론적·실용적 차원 위에 작품과는 떨어져서 위치하기를 요구한다. 왜냐 하면, 문학 작품은 한편으로 우리를 짓밟는 세계 속에 존재를 비지식의 차원 위에서 복원시키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삶이라고 하는 것을 절대적인 가치로서 체험적으로 확인시켜 주고, 다른 모든 자유들에 호소하는 하나의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중에서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읽고 / 중얼중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11. 13. 10:09

<유럽사회와 문화>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읽고

 

 

  그러니까 나는 제목에 완전히 낚였다. 이 책의 제목은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 아니라 지식인을 향한 독설이 되어야 맞을 거다. 작가는 이 책에서 당신은 진정한 지식인인가? 당신이 지식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지식인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지식인이 아니다라는 독설을 우리에게 퍼붓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은근하게 말하긴 했지만, 이 책의 제목은 명백한 반어다.

우리가 생각하는 지식인과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은 다르다. 일반적으로 지식인이라고 하면 가방 끈이 긴 사람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이란 지식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지식인이란 자기 자신 속에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 지배 이데올로기 사이에 벌어지는 대립을 깨닫고, 모든 권력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비판적 지식인이 우리나라에 몇이나 될까?

나는 책을 읽으면서 너무 놀랐다. 분명 이 책은 사르트르가 1965년에 한 강의 내용인데, 오늘 날 우리나라 사회를 너무나 잘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21세기를 미리 내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현재의 교육제도, 대학제도는 사르트르가 말한 그대로의 방법으로 지식인을 만들고 있다.

실천적인 지식인은 위로부터 모집된다.’ 맞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비추어보면, 대학은 기업이 원하는 인재들을 육성한다. 기업이 통계에 관한 전문가가 필요하다 하면 우리는 통계학을 필수교양으로 이수해야 한다. 돈이 되는 학문, 이공계통은 육성하고 케케묵은 인문학을 포기하도록 강요한다. 대학의 주인인 학생들에게 아주 쉽게 징계 처벌을 내리면서 사람이 미래다라는 뻔뻔한 광고를 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고객이 미래다겠지.) 그런데도 공부 좀 했다 하는 대학생들은 그런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상부구조의 관리가 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나는 전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밑줄을 팍팍 쳐가면서 책을 읽었다. 나는 밑줄 옆에 내 전 남자친구 이름을 적었다. (물론 나의 이름도 적었다.) 전 남자친구는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결코 그가 지식인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을 것이다. 그는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일 뿐이었다. 그는 휴머니스트였다. 인간은 평등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는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이라며 나에게 세상에 인문대학생만 남는다면 세계는 곧 멸망할 것이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게 해댔다. 참고로 그는 R.O.T.C.였다. 미군에 의한 베트남 침공을 진보,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하는 통에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그와 헤어졌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온전히 비판할 수 없다. 나 또한 그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도 어느 정도 중간층에 속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도움으로 대학을 와서 편하게 공부를 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럴싸한 직업을 얻어 중간계급에 속할 것이다. 창피한 일이지만 나는 이번 학기가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지 않았던가. 공무원 정도면 먹고 살 걱정은 없겠지. 시험에 통과해서 즐거워하는 나를 막연하게 상상하며……. 선생님께서 첫 수업 때 하신 말을 들으며 나는 혼자서 계속 웃었다. 정말로 노량진에서 슬리퍼 끌고 다닐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프티부르주아 계급에서 나오는 게 맞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정말 먹고 살기에 급급한 사람들은 깊게 공부하고 사고 할 여유가 없다. 이 책만 봐도 그렇다. 누가 이렇게 어려운 책을 읽겠어. 어느 정도 기본 지식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이 책을 소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굳이 이렇게 어렵게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것은 사르트르 고도의 전략이 아닌가 싶다. 지식인은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몸소 실천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과제가 아니었으면 나도 이 책을 꾸역꾸역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공부를 많이 했다고 지식인이 되는 것은 아니며, 이 어려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진짜 지식인이 되는 것도 아니란 것이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3장 때문이었다. 작가는 지식인인가? 나는 나의 위치가 어디쯤일까 궁금했다. 작가는 지식인이 맞겠지. 그럼 나도 지식인? 나는 제대로 뺨을 한 대 얻어맞았다. 결국엔 나는 지식인이 되려면 멀고도 멀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더라.

한때는 언어의 순수한 미만 다룬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것은 사회를 보려고 하지 않는, 사회문제를 볼 의지조차 없는 나의 비겁한 변명이었다. 내가 쓰는 언어가 이미 사회성을 가지고 있는데 순수한 언어의 미가 어디 있을까.

실제로 작가들이 늘어놓는 것들은 다 거짓말이다. 나는 대학에 와서 어떻게 하면 거짓말을 더 그럴싸하게 만들까 하는 방법들만 배웠다. 더 훌륭한 거짓말을 하기 위해 다른 거짓말쟁이들이 늘어놓는 것들을 읽고, 이 정도면 나도 훌륭한 거짓말쟁이지 하며 자위했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는 내내 죄책감이 들었다. 정작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아무 쓸모도 없는 일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작가란 관찰자’, ‘방관자. 그래서 작가는 비겁하다. 나는 내내 내가 비겁하다는 생각만 했다.

결국 나는 자기만족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다. 그나마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글을 쓰는 일이니까. 하지만 정말로 내가 자기만족 때문에 글을 썼다면 일기만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일기를 쓰지 않고 소설을 쓴다. 나는 누군가 내 소설을 읽어주길 바란다. 내 거짓말을 읽고 그 거짓말을 읽을 동안만큼은 그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 소설을 다 읽은 후에 그들이 내 거짓말에 공감하기를, 소설을 읽기 전과는 뭔가 변했다고 느끼기를 바란다.

작가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주 뛰어난 거짓말쟁이다. 하지만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거짓말이 진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글을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쓴다는 행위가 적극적인 사회참여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글을 한 자 한 자 적는데 큰 책임감을 느낀다. 물론 나는 아직 작가도 아니고 지식인도 아니지만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정말 허투루 공부하면 안 되겠다. 스스로에게 창피하지 않은 대학생이 되어야겠다.

 

 

* 참고문헌

장 폴 사르트르, 박정태 옮김, 지식인을 위한 변명, 이학사, 2011


지식인을 위한 변명

저자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출판사
이학사 | 2007-10-3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지식인의 종말이 다가온다?언제부터인가 전 세계적으로 지식인의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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