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카 마론,『슬픈 짐승』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5. 5. 01:00

 

 

가장 이상한 점은 내가 처음부터 프란츠를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전에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 중에서 프란츠는 내가 무서워하지 않은 유일한 남자였다. 나는 더 이상 젊지 않았지만 낯선 남자의 몸에 대해 두려움이 있었다. 그런 수줍음을 극복하고 어느 날, 갑자기, 나의 벗은 몸을, 몇 년 전부터 서서히 시들어가는 것이 측은하던 나의 벗은 몸을 프란츠의 벗은 몸 옆에 눕혔던 것을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그렇게 드러내 보이는 일의 욕망과 두려움에 두 번 다시 나를 내 맡기지 않겠다고 했던 확고함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던 것이 그가 했던 어떤 말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몸짓이었는지 나는 그 다음 날 벌써 기억이 나지 않았다. 프란츠는 알고 있었는데 말하지 않았다. 언젠가, 나의 건망증 뒤에 무언가 심오한 것이 있다는 짐작이 들어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며 물어보자 그는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바깥쪽으로 내 뺨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이것이었어.” (p.31)

 

 

모니카 마론, 『슬픈 짐승』, 문학동네 中

W.G. 제발트,『이민자들』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5. 5. 00:59

 

  • 사자(死者)들은 이렇게 되돌아온다. 때로는 칠십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얼음에서 빠져나와, 반들반들해진 한줌의 뼛조각과 징이 박힌 신발 한 켤레로 빙퇴석 끝에 누워 있는 것이다.(pp.34~35)

 

  •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p.183)

 

 

W.G. 제발트, 『이민자들』,창비 中

베르톨트 브레히트,「상어가 사람이라면」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5. 5. 00:59

상어가 사람이라면

 

  

"만약 상어가 사람이라면 상어가 작은 물고기들에게 더 잘해줄까요?" 주인집 딸인 꼬마아이가 K씨에게 물었다. "물론이지"라고 그는 대답했다. "상어가 사람이라면, 바닷속에 작은 물고기들을 위해 식물은 물론이고 동물까지 포함된 각종 먹이를 집어넣은 거대한 통을 만들어 주겠지. 상어들은 그 통의 물이 항상 신선하도록 유지할 것이고 모든 위생 조치를 취하겠지. 가령 조그만 물고기의 지느러미에 상처가 나면, 상어들의 기대와는 달리 너무 일찍 죽지 않도록 즉시 붕대로 싸매주겠지. 물고기들이 우울해지지 않도록 가끔 커다란 수중 축제가 벌어질 거야. 왜냐하면 우울한 물고기보다는 유쾌한 물고기의 맛이 더 좋거든. 커다란 통 속에는 물론 학교도 있겠지. 이 학교에서 물고기들은 상어의 아가리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법을 배울 거야. 가령 어딘가에서 빈둥거리며 누워 있는 상어를 찾기 위해서는 지리학이 필요하겠지. 물론 가장 중요한 일은 물고기들의 도덕 교육일 거야. 기꺼이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이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과, 무엇보다도 상어들이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할 때는 그 말을 믿어야만 한다는 것을 배우겠지. 물고기들은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이러한 미래가 보장된다는 걸 터득하게 될거야. 물고기들은 모든 저속하고 유물론적이고 이기적이고 맑스적인 경향에 대해 조심해야 하고 그들 가운데 누구라도 그러한 경향을 드러내면 즉시 상어들에게 신고해야 한다고 배울 거야. 상어가 사람이라면, 당연히 다른 물고기통과 다른 물고기들을 정복하기 위해 서로 전쟁을 하겠지. 그들은 물고기들로 하여금 그 전쟁을 하게 할 거야. 자신의 물고기들에게 다른 상어들이 보호하고 있는 물고기들은 엄청나게 다르다고 가르칠 거야. 물고기들은 알다시피 말이 없지만, 다른 언어로 침묵을 지키기 때문에 서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상어들은 발표할 거야. 전쟁에서 적의 물고기들을, 즉 다른 언어로 침묵을 지키는 물고기 몇 마리를 죽이는 물고기에게는 해조류로 만든 작은 훈장을 달아주고 영웅 칭호를 수여할 거야. 상어가 사람이라면, 그들에게도 물론 예술이 존재하겠지. 상어의 이빨이 화려한 색깔로 묘사되고 상어의 아가리가 멋지게 뛰어놀 수 있는 순수한 공원으로 묘사되는 아름다운 그림들이 있겠지. 바다 밑의 극장에서는 영웅적인 물고기들이 열광적으로 상어 아가리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것을 보여줄 거야. 악대가 앞장서서 연주하고 아름다운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 꿈꾸듯이, 그리고 가장 행복한 생각에 젖어서 상어 아가리 속으로 몰려 들어가겠지. 상어가 사람이라면 종교도 역시 존재할 거야. 물고기들은 상어의 뱃속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살기 시작할 것이라고 배울 거야. 또한 상어가 사람이라면, 모든 물고기들이 지금처럼 서로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지는 않겠지. 그들 가운데 일부는 감투를 쓰게 될 것이고 다른 물고기들의 윗자리에 앉게 되겠지. 심지어 큰 물고기들은 더 작은 놈들을 먹어치울 수도 있을 거야. 그건 상어들에게는 그저 즐거운 일일뿐이지. 왜냐하면 다음에 더 큰 먹이를 더 자주 얻게 될 테니까 말이야. 그리고 더 크고 직함을 가진 물고기들은 물고기들 사이의 질서를 돌볼 것이고 물고기통의 교사와 장교, 엔지니어 따위가 될 거야. 요컨대 상어가 사람이라면, 바닷속에는 비로소 문화가 존재하게 될 거야."

 

 

―베르톨트 브레히트, 「코이너 씨의 이야기」 중

요한 볼프강 폰 괴테,『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5. 5. 00:58

 

 

7월 25일 

사랑하는 로테여! 잘 알았습니다. 모든 일을 잘 알아서 처리할 테니, 부디 일을 많이 맡겨 주시오.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내게 써 보내는 편지에는 잉크를 흡수하는 모래를 뿌리지 말아 주십시오. 오늘은 편지를 입술에 갖다 대었더니, 입 안이 깔깔 합니다.

 

 

요한 볼프강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