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문제적 텍스트』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5. 5. 00:20

01. 문학, 문제는 형식

 

<사르트르의 영향, '앙가주망'>

 

* 실존주의

이제 유서 깊은 철학적 전통이 된 실존주의는, 수많은 형식과 변형들을 복잡하게 거느리고 있다. 이 용어와 관련된 저자들마다 차이점이 많지만, 기본적으로 실존주의는 세계 내 인간의 실존에 집중하는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실존주의는 윤리학과 논리학 또는 다른 보편적 원리의 토대를 세우는 데 관심이 있는 주류 철학을 거부하고, 우선 인간의 실존과 그들이 처해 있는 세계 내의 개별적 인간에게 열려있는 가능성을 생각한다. (Langiulli 1997 : 1-30) 프랑스에서 실존주의는 철학·문학·예술 분야에서 나타났으며, 특히 1940~1970년대 초까지 큰 영향을 끼친 사르트르의 글과 결부되어 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철학적 견해를 취한다. 그는 인간에게는 잠재성 있는 존재가 될 자유, 즉 거짓된 생각과 삶의 양식에서 벗어나 이성적으로 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선택할 수 없다고, 즉 '본질'이 '실존'에 선행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이다. (Sartre 1956) 전후 실존주의는 계속된 공포와 '한계 상황 속의 인간'의 체험을 통해 등장한다. (Solomon 1988 :178-9) 홀로코스트를 겪고 나서 어떻게 인간에게 자신을 창조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히틀러와 다른 파시스트들의 체제가 대량학살을 저지른 이후, 어떻게 인간이 '존재할 자유'를 깨닫고 행동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실존주의는 이 질문에 종종 '부정'의 개념으로 대답한다. 최악의 환경에서도 인간에게는 주위의 세계를 부정하고 그 세계의 거짓과 악, 부조리를 인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Albert Camus(1913~1960), 시몬느 드 보바르Simone de Beauvoir(1908~1986) 같은 작가들의 실존주의 문학은, 외적으로 견고하고 끈질긴 자연 또는 사회 세계와 마주한 개인들이 제한된 형식으로나마 자신들의 사유할 자유와 자신들이 대면한 세계의 부조리를 인식하게 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 아방가르드

'아방가르드'라는 단어는 '전위', 앞에 있는 사람,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앞서서 나가는 사람을 나타내는 군사 용어에서 비롯되었다. (Cuddon 1991 :74) 문학과 예술 일반과 관련시켜 볼 때, 이 단어는 19세기에 이르러 기존의 재현 양식에 급진적으로 도전하는, 혁신적 형식을 지닌 예술 형식을 지칭하게 되었다. 아방가르드 운동은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누보 로망을 포함한다. 일반적으로 비평에서는 아방가르드 예술 형식을 급진적 정치 구호나 동기와 연관시키지만, 예술작품이 형식적으로 급진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정치적 동기와 영향까지 급진적인 것은 아니다.

 

 

<글쓰기, 문학, 스타일>

사르트르의 분석에는 형식 문제에 대한 관심이 빠져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과연 그답게 바로 형식-작가가 생산하는 글쓰기의 종류-의 관점에서 사르트르의 주장을 수정하고 비판한다.

 

바르트가 언어·스타일·글쓰기에 다시 비판적 관심을 두는 이유는, 앙가주망engagement(참여) 개념을 이해하는 맥락을 재규정하기 위해서이다. 바르트는 사르트르의 주장에서 보았듯 참여가 작가의 선택과 관련되긴 하지만, 작가는 이 선택의 자유를 실행하는 한계 범위에 주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작가들은 언어 내부에 존재하고 그곳에서 선택한다. 더 중요한 것은, 작가가 이미 존재하는 형식·관습·장르·약호들로 구성된 문학언어 내부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작가들이 자신의 문학언어를 새롭게 만들어낼 수만은 없다. 작가들은 모두 이미 확립된 문학언어와의 투쟁을 통해 작품을 창조해낸다.

 

 

 

 

 


03. 기호학과 탈신화화

 

<순진한 얼굴의 신화 벗기기, 『신화론』>

 

* 신화

고대 그리스에서 신화는 허구를 의미했다. 오늘날 신화는 보통신이나 초자연적 힘을 다루는 허구와 관련된, 고대 이후 지속되어온 허구적 이야기라는 일반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이렇게 신화는 외연적으로는 허구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표면상 무시간적이며 보편적인 호소력과 진리를 지닌 이야기를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바르트가 사용한 신화라는 말은, 자연적이며 무시간적인 것으로 제시되지만 실제로는 역사적으로 구체성을 지닌, 세계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시각의 표현이다.

 

『글쓰기의 영도』나 그와 관련된 에세이들이, 부르주아 문화가 글쓰기를 (바르트가 말하는) '문학'에 동화시키는 방식을 다루었다면, 현대 프랑스 문화의 다양한 양상을 읽어낸『신화론』은 이 동화 과정의 집요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성찰들은 신문, 예술, 상식이 끊임없이 현실을 '자연성'으로 포장해 버리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었던 평소 느낌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분명 역사가 결정하는 것이다. (MY:11)

 

바르트의 주장에 따르면, 부르주아 '문학'이 글쓰기를 표면적으로 무시간적인 가치로 동화시키듯, 문화도 언제나 인공적이며 대량생산된 것들 트히 이데올로기적 대상과 가치들을 논의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여준다. 여러 이론가들은 (문화적 현상을 자연적 현상처럼 제시하는) 이 과정을 이데올로기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러한 의미의 이데올로기는 역사적이며 특수한 문화로 창조된 것을 무시간적이며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것처럼 제시하는데, 이 과정은 때로 일종의 게으름의 산물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쉬르의 영향:기호학과 구조주의>

 

바르트가 말하는 기호학semiology이란 무엇인가? 기호론semiotics이라고도 불리는 기호학은, 소쉬르 사후인 1915년 그의 강의를 묶어 출판한 『일반 언어학 강의Course in General Linguistics』에서 정초된 기호의 일반 과학이다. 소쉬르는 인간의 모든 기호 체계를 체계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과학을 꿈꾸었으며, 따라서 기호학은 종종 언어학적 기호 체계에서 발견되는 기호 분석에 사용되었다. 기호학과 『신화론』마지막 부분에서 바르트가 했던 말을 이해하려면, 당연히 소쉬르가 쓴 기호라는 말의 의미와 기호의 정의를 낳게 하는 언어 이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 파롤과 랑그

소쉬르는 언어학을 재정의하며 언어의 실제적, 잠재적 행위가 무한하다는 문제에 직면한다. 언어학자는 실제로 일어나는 모든 언어 행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소쉬르의 해결책이자 그의 새로운 언어학의 핵심은 언어의 발화 행위(파롤)와 언어 그 자체(랑그)를 구분하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모든 가능한 언어 행위(파롤)는 체계(랑그)에서 만들어진다. 이 언어 체계(랑그)는 발화(언어 행위, 파롤)를 가능하게 하는 규칙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소쉬르 이후 구조 언어학은 언어의 실제 행위(파롤)을 연구하기보다 랑그의 체계와 규칙, 약호를 연구한다.

 

 

구조주의는 (소쉬르 이후의) 언어 중심의 사고가 이 학문들에 좀 더 객관성과 과학적 지위를 부여할 수 있다고 믿고, 체계와 함께 혹은 체계 아래 작동하는 인간 주체보다 구조적 체계의 규칙과 약호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전통적인 인문과학의 의미와 역사에 대한 연구방식을 거부한다. 따라서 구조주의는 개인의 문학 텍스트와 같은 파롤의 내용(의미)보다, 먼저 그 내용들의 집합articulation을 가능하게 해주는 규칙과 약호(체계)를 확립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비평적 연구로서의 구조주의는 문학 텍스트를 낳게 하는 체계를 연구한다. 즉, 문학 텍스트를 그 자체로서 혹은 텍스트를 위해 연구하지 않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해, 용어로서의 구조주의와 기호학은 상호 보조적이며, 따로 분리시켜 정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바르트의 저작에서는 기호학이 종종 기호 체계를 연구하는 작업에 쓰이는 반면, 구조주의는 문학 서사의 분석에서 자주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기호학과 신화>

 

* 기호, 기표, 기의

소쉬르는 단어 또는 기호sign를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다시 정의한다. 기호에는 세계의 대상 혹은 행위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의미가 없다. 기호는 물질적 기표signifier(소리 혹은 문자)와 기의 signfied(개념)의 결합이며, 기의는 실제 대상이나 행위가 아니라 개념을 의미한다. 영어에서 k+a+u(cow)라는 소리의 조합은 소(집에서 기르는 암소 또는 소 속屬에 속하는 모든 동물)라는 기의(개념)에 연결되어 있다. 물론 독일어에서는 kuh라는 기표가 이 임무를 수행하며, 프랑스어에는 vache라는 기표가 있다. 기호는 자의적이며, 세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의미를 지니지 않지만 언어 체계(랑그)의 자리와 관련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언어는 단지 일종의 기호 체계일 뿐이다. 이 세상에는 고속도로 표지판부터 건축 디자인, 우리들이 입는 옷, 우리가 먹는 음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기호 체계가 있다. 사회의 모든 것은 이러한 의미의 기초이며 체계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쉬르의 주장대로 언어 체계처럼 연구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신화」에서 바르트는 기호가 실제적으로 세 가지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소쉬르가 묘사한 언어와 신화적 기호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다. 그 차이란 바로 신화의 기호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 신화의 표리부동성 혹은 이중성을 인식하게 한다는 것이다.

 

소쉬르가 연구언 언어는 1차 체계 a first-order system이다. 그것은 기표, 기의, 그리고 기표와 기의가 기호로 결합된 것을 의미한다. 신화는 이미 존재하는 기호에 작용하는데, 그 기호가 씌어진 말이든, 텍스트든, 사진이든, 영화, 음악, 건축, 장식품이든 상관이 없다. 프랑스 흑인 군인의 사진의 기호는 이미 하나의 기호이다. 신화는 이 기호를 새로운 기의 혹은 새로운 개념을 지닌 기표로 전환시킨다. 바르트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신화는 특이한 체계다. 그것은 신화 이전에 존재하는 기호학적 연쇄로부터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호학적인 2차 체계 a second-order semiological system이다. 1체계의 기호(다시 말해 개념과 이미지의 총합)는 2차 체계에서 기표에 불과하다."(MY:114)

 

여왕 어머니의 관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군중을 찍은 신문 사진은 1차 체계의 기호이다. 즉, 군중의 사진 이미지가 기표가 되고, 안치된 여왕의 어머니를 보기 위해 기다리는 군중들의 기의이며, 기호는 토픽 기사를 '안치된 여왕을 보기 위해 수시간 동안 줄을 선 군중들'로 포장하는 언론의 보고이다. 그러나 신화는 이 이미지를 2차 체계의 층위로 옮기고 이 기호를 새로운 기의를 위한 기표로 전환시킴으로써, "영국 민중과 국가 혹은 영국 대중들의 군주제에 대한 통일된 사랑(또는 수용)'이라는 새로운 기호를 만들어낸다. 바르트는 이 관계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더 평범하긴 하지만 누구나 알 수 있는 예로 '고양이가 담요 위에 앉았다. The cat sat on the mat.'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예의 변형을 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이제 신화의 표리부동성 혹은 이중성을 읽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다. 신화는 의미를 납치하여 2차 체계의 의미 혹은 바르트가 말하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으로 전환시킨다. 여기서 의미작용이란 2차 체계의 기호, 즉 이미 존재하는(1차 체계의) 의미와 기호를 변형시켜 생산된 의미를 말한다.

신화는 1차 체계의 언어에 작용하여 이미 존재하는 의미에서 새 의미를 생성시킨 언어이므로, 일종의 메타언어metalanguage이다. 하지만 바르트가 상기시키듯이, 원래의 1차 체계의 의미가 완전히 망각되는 것은 아니다.

 

 

 

 

 

05. 탈구조주의와 저자의 죽음

 

<과학을 넘어, 새로운 기호학>

 

다른 글에서 바르트는 자신이 거쳤던 구조주의적 단계가 '분류학Systematics'을 시도하는 어떤 기쁨 때문에 일시적으로 범주와 분류를 창조하려는 강박관념에 빠졌던 시기였다고 말한 바 있다.(SC:6) 그래서 바르트는 1960년대 주반까지 자신이 1971년의 책 『사드/푸리에/로욜라 Sade/Fourier/Loyola』에서 연구한 세 작가들과 비슷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 텍스트에서 바르트는 특이하게도 서로 다른 세 명의 저자들을 한데 묶는다. 마르키 드 사드Marquis de Sade(1740~1814)는 포르노그라피적 문학 작가로 악명이 높고,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Royola(1491~1556)는 제수이트 교파의 설립자이자 『정신 수련Spritual Exercise』의 저자이며, 샤를르 푸리에Charles Fourier(1772~1837)는 유토피아적 정치 문학을 쓴 작가이다.

바르트는 이렇게 서로 다른 저자들이 체계와 분류에 대한 강박관념을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드는 성적 행위들을 분류하며, 로욜라는 정신적 행위들을, 푸리에는 총체적으로 조화된 자신의 상상적 사회 속에서 사회적 행위들을 분류한다. 그들은 모두 '언어의 창시자'이며, 자신들 주변의 실제 세계를 재현하기보다는 자신들의 텍스트 안에서 세계를 창조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구조주의적 단계의 바르트도 분류를 사랑하는 또 다른 사람으로, 즉 사드, 푸리에, 로욜라처럼 강박적으로 분류가 만들어내는 쾌락을 지니고 있으며, 또 분류 그 자체에서 쾌락을 느끼는 사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와 기호의 해체>

 

* 해체

자크 데리다의 초기 저술들이 나온 이후, 해체론은 인문학과 그 밖의 모든 분야에서 중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데리다의 저서는 전통적인 대립항(또는 이항대립), 즉 남성/여성, 말하기/글쓰기, 철학/문학, 진리/허구, 밖/안, 형식/내용 등의 붕괴와 결부되어 있다. 그의 논의는 소쉬르의 기호에 대한 새로운 분석으로 시사한다. 소쉬르는 기호를 기표(소리 혹은 표기)와 기의(개념)의 결합으로 보았다. 그러나 기표와 기의 관계는 자의적인 것이다. 그 관계는 기표를 특정한 기의와 관련시키는 현재의 관습(그것이 현재 작동시키는 언어 체계)에 불과하다. 소쉬르는 "언어네는 차이만이 있을 뿐 '긍정의 관계'는 없다"고 했는데, 이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순수하게 구조적이며 순수하게 관계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기의는 '긍정의 관계'도 아니고 필수적이고 최종적인 의미도 아니며, 단지 기표와의 관습적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다. 기호의 의미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로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기호 체계(랑그) 안에서 기호가 차지하는 자리의 관계로 확립된다. 데리다는 처음부터 이를 지적하고, 이 점이 서양의 전통적 의미 개념에 함축되어 있다는 점을 정성스럽게 증명한다.

데리다에게 소쉬르가 정의한 기호는 의미가 기호에 포함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의미가 관계적이라면, 그리고 모든 기호가 다른 기호와의 유사성과 차이로만 의미를 갖는다면, 의미 자체도 관계적이어야 한다. 만약 '문화'와 같은 기호의 의미를 조사해보면, 그 단어의 기의가 또 다른 기의들을 필요로 하는 기표로 전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문화'의 의미를 확립시키려면 자연적이지 않음, 인간이 만든 것, 역사적인 것, 취향, 사회적 특권, 상부구조(마르크스주의 용어), 언어, 교육 등의 기의들을 피할 수 없다. 이 새로운 기의들은 '문화'라는 기표를 기의로 만들어주지만, 그 기의들은 각기 다른 기의와 관련해서만 의미를 지니며, 또 그 각각의 기의들은 새로운 기의가 필요한 기표가 된다.

데리다는 의미가 속박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소쉬르가 부분적으로 포착했듯이, 의미는 순수하게 관계적이다. 의미의 유희(기의의 관계적 운동이 무한한 기표가 되는 것)를 정지시키려면, 데리다가 초월적 기의(다른 기호에 의존하여 의미를 갖지 않는 기호)라고 부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초월적 기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따라서 의미의 유희도 종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데리다의 해체론적 철학의 근본적인 교훈이다. 이는 최종적이고 안적적인 의미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담론(철학적, 논리적, 종교적, 법적, 인문학적, 과학적)을 붕괴(해체) 시키는 교훈이다.

 

 

이 논문에서 데리다는 구조의 관념 자체를 검토한다. 데리다는 구조의 관념이 구조주의에도 중요하지만, 철학적 전통이 시작된 이래 모든 사고 체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데리다는 모든 구조에 대한 관념이 의미가 나오는 중심, 기원, 토대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문학작품의 중심은 전통적으로 저자로 간주되어왔다. 저자는 모든 의미의 원천이자 문학작품을 낳는 원천이었다. 문학작품을 구조나 언어 체계로 다룰 경우에도, 저자를 구조의 중심(기원, 원천)으로 상정하는 태도는 불가피하며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마치 신이 종교적 담론에서 체계와 구조로서 보편성의 창조자로 보이는 것처럼, 전통적으로 문학작품의 저자도 구조로서의 작품에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실 데리다가 지적한 대로, 중심(질서 혹은 정향성의 중심)이라는 관념 없이는 어떤 구조(안정성과 질서를 동반하는 개념)도 생각하기 어렵다.(Derrida 1981:278-89) 구조가 어떻게 비조직적일 수 있는가? 구조는 분명히 질서의 핵심, 즉 모든 구조들을 아우르는 중심을 갖고 있다.

중심(중심이 있는 구조라는 관념)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은 전통적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 이후 소위 의미의 활동은 끝나야 하는 것,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중심은 의미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기원 혹은 원천으로, 궁극적으로 사라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심은 의미의 유희 자체와 관련된 것도 아니고, 그 유희가 생산하는 구조에 직접 관련된 것도 아니다. 문학작품의 저자처럼, 중심은 의미의 유희(구조)를 성립시키지만 유희 그 자체를 낳지는 않는다. 문학작품을 읽을 때,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의미의 구조 혹은 체계로 간주되는 작품의 궁극적 지시 지점이자 근원자로 저자를 작품 뒤에 상정한다. 데리다는 이 전통적 관념에서 논리적 모순을 추출하여 보여준다.

 

"중심은 ¨¨ 자신이 개시하여 성립시킨 유희를 종결시킨다. 중심은 내용과 요소와 용어의 대체가 더 이상 불가능한 지점이다. ¨¨ 중심은 유일한 것으로 정의되며, 구조를 지배하며 구조 내부를 구성하지만 구조성을 벗어난다고도 생각돼왔다. 이 때문에 구조에 대한 전통적 사유는, 역설적이게도 중심이 구조의 안에도 있고 구조의 밖에도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심은 전체의 중심에 있지만, 전체에 속해 있지는 않다.(전체의 일부도 아니다.) 따라서 전체의 중심은 다른 곳에 있다. 중심은 중심이 아니다. 중심이 있는 구조의 개념-비록 이 개념이 철학 또는 과학으로서 에피스메테〔앎〕의 조건인 일관성으로 재현되지만-은 모순적으로 일관적이다"(1981:279)

 

구조라는 말이 관계적 의미의 그물망-예를 들어, 문학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모호성과 긴장, 잠재적 결합-을 의미한다면, 이러한 의미를 위해 기원과 종결점, 중심을 찾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중심은 구조 자체를 존재하게 한다는 점에서 초월적 기의로 기능한다. 그것은 구조(의미의 유희)에 참여하는 구조가 아니라 토대가 되는 구조다. 하지만 중심과 초월적 기의를 찾으려 하면, 데리다 말대로 중심과 기의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이 중심들이 언제나 명백히 안정된 구조 바깥에 언제나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스스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문학작품의 중심을 저자로 상정하려 할 때, 그 기의에 정박할 수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 데리다는 기호학자나 구조주의자들이 규정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안정된 구조(기호 체계) 대신, 언어에서 일어나는 끝없는 의미의 유희를 제안한다. 이 의미의 끝없는 유희는 데리다의 책과 대부분의 탈구조주의 저작에서 에크리튀르(글쓰기), 차연, 텍스트성 등 여러 이름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용어들의 핵심적 의미는 데리다가 간단하게 표현한 바 있다. "초월적 기의의 부재는 의미의 영역과 유희를 무한하게 확장시킨다."(1981:280) 기호(의미작용)의 의미는 결박되거나 중단되거나 종료될 수 없가. 모든 기의가 무한한 과정에서 새로운 기표가 되므로,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 텅 빈 기호의 제국>

 

1970년에 출간된 바르트의 일본 연구서 『기호의 제국Empire of Signs』을 보면, 해체론적 사고가 바르트의 글쓰기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지 관찰할 수 있다.

 

… 하이쿠는 단지 표면일 뿐이며, 감춰진 혹은 궁극적인 기의를 지니고 있지 않다.(데리다적 의미에서, 중심이 없다.)

 

… 서양의 시각으로 동양을 진단하는 대신, 바르트는 일본을 하나의 텍스트로 읽는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일본을, 전통적 읽기reading가 추구했던 안정되고 한정적인 종류의 의미의 회복(발견)을 초월한 텍스트, 다시 말해 끝내 읽을 수 없는 텍스트로 읽는다는 점이다. 바르트는 1970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본에서 읽었던 것처럼, 기호의 연쇄를 정박시킬 수 있는 최고의 기의나 근본 원리는 없습니다."(GV:99)

일본은 기호가 '최고의 기의'(중심 혹은 초월적 기의)에 정박되지 않는 텍스트이며, 바르트에게 어떤 형식의 글을 쓰도록 자극한다. 하나의 궁극적 기의에 정박되지 않는 기표와 마주한 독자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 즉, 독자는 자신만의 일시적인 구조와 패턴, 의미들을 텍스트로 끌어와 텍스트를 재창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텍스트, 저자, 독자에 대한 바르트의 탈구조주의적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읽기가 곧 쓰기가 되는 이 과정이다.

 

 

 

<탈구조주의 선언, 저자의 죽음>

 

『저자의 죽음』은 읽기, 쓰기, 그리고 읽기과 쓰기가 포함된 텍스트와 기호의 관계라는 문제에 대해 바르트가 발전시킨 탈구조주의적 연구가 농축된 표현물이었다.

바르트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자는 언제나 문학작품의 기표가 정박하는 곳으로 기능해왔다. 저자는 작품의 중심으로 상정된다. 저자는 작품의 모든 의미의 기원이며, 모든 읽기의 목표가 되는 사람이다. 바르트는 이렇게 쓴다. "사람들은 여전히 작품에 대한 설명을 생산자의 인격 안에서 찾는다. 마치 다소 투명한 허구의 알레고리를 통해, 결국 언제나 단 하나의 동일한 사람인 저자가 "내밀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 것처럼."(RL:50)

… 다시 말해, 저자의 형상은 의미의 유희를 축소시키고 끝낼 수 있게끔 계획되어 있다. 같은 해 미셸 푸코는 … "저자란 …… 사람들이 의미의 확산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표시해주는 이데올로기적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Foucault 1979:151)

 

… 바르트와 크리스테바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는 사람들이 모든 텍스트에 소비할 수 있는(명확한, 해독 가능한, 읽을 수 있는, 한정된) 의미가 있다고 믿기를 원한다. 이러한 의미의 문학은 지배사회가 소비주의의 지류로 취급하는 문학일 뿐이다. 독자들은 책을 사고 읽고 의미를 찾아내어 그것을 소진한 다음 다른 책을 사도록 장려된다. … 글쓰기는 저자라는 허구적 토대에서 자유로워 질 때 소비의 관념을 붕괴시키기 위해 작동할 수 있다.

 

"복수적 글쓰기에서는 모든 것이 풀어나가야 하는 것이지 해독해야 할 것은 없다. 그 구조는 모든 활동과 모든 단계마다 실처럼 얽혀 있지만, 끝도 없고 바닥도 없다. 글쓰기의 공간은 횡단해야 하는 것이지 관통하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는 언제나 의미를 상정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의미를 증발시키기 위해서이다. 글쓰기는 의미를 체계적으로 사라지게 하고자 한다." (RL:53-4)

 

저자의 속박에서 자유롭고 최종적 기의가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글쓰기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바르트의 대답은 텍스트text의 개념 안에 있다. 그것은 저자가 배후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전통적인 작품work 개념과 명백히 구분되는 것이다. 바르트의 유명한 말이 있다.

 

"이제 우리는 텍스트가 단일한 '신학적'의미(저자-'신의 메시지')를 풀어놓은 몇 줄의 말이 아니라, 다차원적 공간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공간에는 서로 결합하고 경쟁하는 몇몇 글쓰기가 있을 뿐, 기원은 없다.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적 원천에서 비롯된 인용의 직물이다."(RL:52-3)

 

 

 

 

 

06. 텍스트와 텍스트성

 

1970년대 출간된 『S/Z』는 탈구조주의적 단계에서는 물론이고, 바르트의 삶 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바르트의 텍스트 이론이 완전하게 표명된 곳이 바로『S/Z』이기 때문이다.

 

 

* 상호텍스트성

문학 연구에서 중요한 용어가 된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가와 비평가들이 다양한 정의를 내린 바 있는데 특히 크리스테바는 문학 언어의 대화적 본성과 관련된 용어로 사용한다. 문학 텍스트는 더 이상 유일하고 자율적인 전체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약호들, 담론들, 그리고 이전의 텍스트들이 낳은 산물로 간주된다. 이러한 이유로 텍스트의 모든 단어는 상호텍스트적이며, 텍스트 자체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의미의 측면에서도 읽혀져야 하겠지만, 텍스트 바깥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화적 담론으로 텍스트의 안과 밖에 대한 상식적인 개념들에 문제를 제기하며, 또한 의미는 텍스트 자체에 포함될 수 없고 속박될 수도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크리스테바의 독자들은 상호텍스트성을 '영향'과 같은 저자 중심의 전통적 개념과 혼동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상호텍스트성은 다른 텍스트를 지시하려고 하는 저자의 의도가 아니다. 상호텍스트성은 의미작용, 의미, 문학적 언어와 모든 언어의 조건이다.

 

 

"작가는 독창적인 몸짓을 취할 수 없다. 다만 이전의 몸짓을 모방할 뿐이다. 작가의 유일한 힘은 글쓰기를 뒤섞어 다른 글쓰기와 대립하게 함으로써, 하나의 글쓰기에만 기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만약 작가가 자신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최소한 자신이 '번역'하고자 하는 내적인 '것'이 이미 만들어진 사전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그 사전의 단어들은 오직 다른 단어들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으며, 그 과정이 무한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RL:53)

 

 

바르트는 저자에 토대를 둔 전통적인 작품work 관념과 텍스트text를 대조시키면서, 작품은 도서관과 서점에서 볼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지만, 텍스트는 오직 새로운 독자가 생산해낼 때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텍스트는 오직 활동 속에서, 생산 속에서만 경험된다."(RL:58)

우리는 텍스트를 접할 때, 원천과 기원이 아니라 이미 씌어지고 이미 말해진 것을 다룬다. "텍스트를 이루는 인용은 익명적이고 돌이킬 수 없으며 이미 읽혀진 것이다. 그것은 인용부호가 없는 인용이다."(RL:60)

 

 

 

 

07. 중립적 글쓰기 - 쾌락·폭력·소설

 

<독사/파라독사, 권력적 언어/비권력적 언어>

 

여기서 독사Doxa란 "여론, 대다수 프티부르주아의 마음"이다(RB:47)

 

독사는 주류 문화에 동화된 것, 자연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인데, 바르트는 자기 자신의 생각에 저항함으로써, 자신의 글쓰기가 자연화되어 또 다른 독사가 되지않게 하려는 시도를 계속할 수 있었다.

 

…새로운 '제3항'의 일차 후보는 '중립le neutre'라는 말이다. 바르트는 '중립'이란 독사와 파라독사의 갈등을 해결하는 '제3항'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 2항이며, 제 1항은 폭력(전투, 승리, 연극, 오만)"이라고 쓰고 있다.(RB:132-3)

 

권력적 언어와 비권력적 언어의 대립은 에크리방스ecrivance와 에크리튀르ecriture라는 또 다른 중요한 대립과 관련된다. 이 두용어는 두 종류의 글쓰기를 대변한다. … 에크리방스는 글쓰기(에크리튀르)와 대립하는 것으로 번역해야 한다. "에크리방스는 에크리튀르가 아니라 사이비 형식이다."(RL:244)

 

"언어는 에크리방스에서와 같이 관념 혹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될 때에는 요약될 수 있지만, 에크리튀르에서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될 때에는 요약될 수 없다."(SW:84)

 

바르트에게 에크리튀르 혹은 적절한 글쓰기란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된'언어이며, 또 자신의 조건이 언어라고 생각하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에크리방스는 관념을 실어 나르는 매개물로 사용되는 언어이다. 에크리방스는 '저자의 언어'처럼 반짝거릴 수는 있지만, 단언적이며 단일하고 안정된 의미를 전달하는 투명한 매개물로 간주되고자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에크리방스는 권력의 언어이다. 이데올로기를 대표하여 작용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에크리방스는 '권력적'언어에 상응하고, 에크리튀르는 '비권력적'언어에 상응한다.

 

 

<주체가 상실되는 쾌락주의적 텍스트>

 

* 주체

전통적으로 주체subject는 '사유하는 주체의 의식'이라는 관념을 지칭하거나 개인의 자아 또는 에고를 가리키는 말이었다.(Hawthorn 1992:180-2) 플라톤 이후 철학은 주체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보통 주체를 (바르트가 말한 전통적 저자 개념처럼) 의미의 중심이자 기원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주체를 특권화시키는 전통적 발상은 구조 주의에서, 특히 탈구조주의에서 공격을 받게 된다. 탈구조주의에서 주체는 지배이데올로기나 언어로 구성된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한다. 전자(지배이데올로기)의 길을 따르는 이론가들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 이는 특히 루이 알튀세르의 저서에 잘 나타난다. 반면 후자(언어)의 길을 따르는 이론가들은 일반적으로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의 영향을 받는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대한 설명을 발전시킴으로써 전통적인 주체 개념에 중요한 도전을 했다.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은 주체가 알 수 없는 것인 동시에 주체의 행위와 욕망, 가족관계와 사회관계의 원천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적 탐구 덕분에, 주체에는 혼란스러운 틈 또는 분열이 나타나게 된다. 현대 언어학에 기대어 프로이트를 다시 읽는 데 집중한 라캉의 이론은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유명한 선언에서 절정에 달한다. 주체는 더 이상 인간의 행위와 사유의 원천이나 기원이 아니라, 언어의 현존이 감지되는 장소가 된다. 이러한 생각은 문법적 주어(주체)subject의 특성에 대한 고찰을 통해 더욱 강화된다. 하나의 문장에서 주어는 '동사를 끝내기 위한 "주격nominative"을 구성하는 단어 혹은 단어들'(OED)이다. 주어는 문장의 술어를 지배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I love you'처럼 일반적인 문장에서 주어는 'I'라는 단어이다. 바르트 같은 탈구조주의자들은 이 문법적 의미에서 보이는 주어의 배후 또는 주어를 초월한 곳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싶어한다. 예컨대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유일하고 순수하게 개인적인 감정(전통적으로 생각된 주체의 의미)을 표현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술어 앞에 주어, 목적어 앞에 술어를 두는 식으로 필요한 문장의 구성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며, 또한 가장 남용된 상투어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주체는 언어에서 사라지고, 언어에 의해서 또는 언어를 통해서 구성되고 있다. 탈구조주의는 모든 언어가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본다. 의미의 원천은 인간 주체가 아니라 주어 안에서 주어를 통해 작동하는 언어이다.

 

  

그레이엄 앨런,《문제적 텍스트 롤랑/바르트》, 앨피, 2006 

롤랑 바르트,『텍스트의 즐거움』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5. 5. 00:12

<역자 서문>

 

바르뜨는 텍스트(Text)를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읽혀지는"(lisible) 텍스트와 "쓰여지는"(scriptible) 텍스트.

 

현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용어를 사용하여, 첫번째 종류의 텍스트는 "소비되어지는 것"으로, 독자가 책을 읽는 동안 아무런 충격 없이 언어를 소비하여 "버리는" 소위 인스턴트 텍스트를 이른다. 그러나 두번째 텍스트에서 독자는 읽어 가는 동안 단속적인 충격을 지속적으로 받음으로 독서 방법에 있어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의 방법을 거부하게 된다. 이 때 발생하는 틈 사이를 독자 자신의 텍스트로 "재생산해 내는" 반성적인(reflexive) 텍스트가 생겨난다.

 

부연하여, 이 "쓰여짐"의 텍스트는 독자 자신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텍스트를 유도하는데, 이 때 독자는 독서 시간의 흐름을 단속적으로 잘라 내어 그 틈 사이에서 그 텍스트와 독자는 수직적인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

 

 

독자 ─────────>         독자 ------------------->

                                                    │ │ │ │ │ │

텍스트 ────────>         텍스트 ---------------->

    "읽혀지는" 텍스트                       "쓰여지는" 텍스트

 

 

이처럼 "쓰여지는" 텍스트란 독서시간을 단속적으로 분할하여, 수직적으로 단절시키는 힘을 가진다 - 바르뜨는 Image, Music, Text에서 이 "읽혀지는" 텍스트를 "작품"(Work)으로 그리고 "쓰여지는" 텍스트를 "텍스트"(Text)로 구분하고 있다.

 

본문의 "청취"의 장에서 바르뜨는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수직적인 독서방법에 대하여 매우 흥미있는 발언을 하고 있다 : "만일 텍스트 그 자체가 간접적으로 들리도록 유도되어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서 최상의 즐거움을 산출해 내게 된다; 만일 그것을 읽는 동안, 내가 자주 위를 쳐다보고, 그 밖에 어떤 곳에 귀를 기울인다면 말이다" 독서를 한다는 것은 읽어서 소비하는 것 말고("읽혀지는"텍스트), 독자 자신이 직접 텍스트에 참여하여 텍스트를 써 나가는 방법이 있다("쓰여지는" 텍스트). "내가 독자를 만들어 내겠다"고 단언하고 나선 버나드 쇼우 경우처럼, 텍스트는 소비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독자가 만들어 내는 것을 이른다.

 

생략........

 

 

 

"내가 신을 본 그 눈은 신이 나를 본 그 눈과 똑같다." -

에인젤루스 실레시우스

 

 

 

 

<해설>

텍스트의 즐거움

- 롤랑 바르뜨(Roland Barthes)의 죽음 -

 

롤랑 바르뜨는 1915년 11월 12일 쉘부르(Cherbourg)에서 태어나 파리대학에서 불란서 문학과 고전을 공부했다. 루마니아와 이집트의 대학들에서 불어를 가르쳐고, 후에 그는 과학연구국립 연구소(Centre National de Recherche Scientifigue)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사회과학 어의학의 연구에 전념했다. 1980년 3월 26일 죽을 때까지 그는 프랑스대학(College de France)의 교수로 있었다.

 

"바르뜨는, 소르본(Sorbonne) 앞에 있는 에꼴가(rue des Ecoles)에 있는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세탁운반물차에 치어 죽었다. 그는 철학가 미셀 푸코(Michel Foucault)와 당시 사회주의 반대파의 지도자 프랑소아 미테랑(Francois Mitterand)과 함께 막 점심식사를 마친 후였다. 그 사고는 3월 25일 일어났는데, 만일 그가 그해 초 그의 어머니 앙리에뜨 바르뜨(Heriette Barthes)의 죽음에서 시작된 극심한 우울증에 빠지지 않았던들, 그는 그의 상처로부터 살아 남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1973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그의 작품들의 비평적 독자들이 오랫동안 의아했던 사실을 인정하는 말을 했다 : 살해할 라이우스(Laius)를 갖지 않은 오이디푸스(Oedipus)는 라이우스를 발명해 내야 한다 : 그리고 바르뜨의 경우 그의 라이우스는 그가 Doxa라 부르는 것으로, 이는 그가 부르조아를 특징 지우는, 인정되어 이미 기성화된 의견이나, 상투적인 고정관념들로, 일련의 숨막히게 하는 것들을 이른다.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이 가지는 이미지는, 하나의 점이 또 다른 고정된 점으로 이동하여 하나의 직선으로 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쉽게 시각적으로 파악이 가능하며, 또한 기록 가능한 것이다. 위 인용에서 우리는 다섯 사람의 죽음을 본다. 바르뜨의 아버지, 어머니, 바르뜨, 그리고 라이우스와 오이디푸스. 이 중에서 오이디푸스와 라이우스는 신화적 문맥에서 하나의 은유(metaphor)로써, 심리학적으로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제우스가 그의 아버지 타이탄을 살해하고 그의 왕국을 건설하듯이, 오이디푸스는 그의 아버지 라이우스를 살해하고 자신의 왕국을 통치하게 된다. "아버지"가 심리분석에서 가지는 의미는 그것이 가지는 오래되고 낡아 새로운 충격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고, 그 아들은 새로운 충격으로 그 아버지를 살해해야 할 의무를 지니게 된다. 이 의무감을 Harold Bloom은 Anxiety of Influence라고 불렀다. 선배들에 대하여 후배는 항상 전복적이고 아니면 적어도 그가 손대지 못한 부분을 완성해야 되는 짐을 가지게 된다. 쉽게 우리는 이런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글을 쓸 때 사용하게 된다. 우리는 이미 선배가 쌓아 놓은 지금까지의 업적들을 살펴보아야하고 미진한 곳을 보완하고 잘못된 곳을 고치고, 그리고 선배가 쌓아 놓은 업적들을 송두리째 바닥부터 흔들어 놓으려는 충동을 가지게 된다.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다 아는 것을 쓴다면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쓴다는 그 자체에 어떤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하게 된다. 새롭게 쓰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선배의 글을 읽게 될 것이고 그들의 약점을 찾아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배의 키가 커서 그 그림자가 길고 넓게 가리워져 있으면, 우리는 그 속에서 빠져 나오기에 수백 날의 세월을 소비했음을 영문학사에서 찾아보게 된다. 쵸오서가 그랬고 셰익스피어가 그랬으며 밀튼의 그림자가 그러했다. 우리는 유럽의 낭만주의가 셰익스피어의 새로운 연구에서 시작되었음을 안다. 셰익스피어는 낭만주의가 살해해야 할 라이우스였다.

바르뜨가 그의 라이우스로 여겼던 부르조아의 안정되어 변화를 거부하는 "Doxa"란 이미 마르크스가 거부했고, 사르트르가 총격을 가했던 낡은 노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그 노인에게 계속해서 재생산해내어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들"을 계속해서 복사해 놓았다. 심지어 신화 비평은 이 아버지를 숭배하는 입장을 고수했으며, 현대 비평은 오이디푸스들을 계속해서 복사해 놓아야했다. 우리는 오이디프스들을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여러 가지 모습에서 보게 된다. 여성학 비평, 마르크스주의 비평, 해체주의 등등 바르뜨 역시 하나의 오이디푸스로서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탈바꿈한 인물중 하나이다.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그의 De La Grammatologie(Paris:Edition de Minuit, 1967)라는 책을 썼다. 제목이 뜯하는 grammar of writing이 시사하듯이,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관심은 간단히 말해 "작문"(wrting)의 생산성(productivity)이 무엇이냐 하는 점에 집중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푸코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보자.

 

This play of transgression and being is fundamental for the constitution of philosophical language, which reproduces and undoubtedly produces it.

이곳에서 "being"이란 데리다가 말하는 "presence"이고, 바르뜨가 이야기하는 "doxa"이다. 그것은 아무런 존재 이유 없이 인정되고 사용하는 관념이며, transgression은 데리다가 말하는 "difference"이고 바르뜨의 오이디푸스이다. 이처럼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작문"(writing)의 "문법"(grammar)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나는 바르뜨의 죽음에 대하여 필립 쏘디(Philip Thody)의 글 중에서 인용한 부분이 있다. 첫 문장에서 Thody는 바르뜨가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세탁운반차에 치여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두번째 문장에서 유명한 두 인물 Michel Foucault와 Francois Mitterand을 들어 그가 죽기 전 그들과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서 바르뜨 어머니의 죽음과 바르뜨의 우울증, 그리고 그의 죽음의 원인은 그 교통사고 보다는 그의 우울증에 대하여 더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문장을 바꾸어 그가 죽은 달에 출판된 책 La Chambre Claire : Note sur la Photographie(Cahiers du Cinema, Gallimard, Seuil)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책에서 바르뜨는 그의 어머니가 그의 삶에 차지하고 있는 정서적 중요성에 대하여 쓰고 있다: "텍스트의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그런 텍스트에는 "진지한 것"과 "부질없는 것이"함께 한다고 바르뜨는 말했다. 바르뜨의 죽음과 세탁운반차. 그 얼마나 바르뜨다운 죽음인가? Foucault와 Aids 만큼이나 말이다. 일생 동안 바르뜨는 "작문"(writing)의 taboo에 대하여 싸워 왔다. 그러나 Thody는 철저하게 그 taboo를 깨뜨리고 싶지 않은 것인가? sexuality의 역사를 3부작이나 쓴 Foucault가 Aids 때문에 죽었다는 것은 얼마나 작문의 taboo를 깨뜨리는 "텍스트의 즐거움"을 우리에게 안겨 주는가? (ㅋㅋ) 오히려 바르뜨가 담배값이 없어 담배집 주인과 싸우고 나서 사고가 났다면? 바르뜨의 죽음의 텍스트에서 즐거움은 두 명의 유명한 인물과 점심 식사에서 반감하고, 그의 우울증에 대하여 언급할 때 우리는 그 혐오감 나는 심리분석에서 풍기는 젊잖은 그 말투에서 다시 한번 토라져 버리고 만다. 마치 바르뜨는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됐다는 말인가? 죽음은 이처럼, 가볍고 부질없어서는 안 됐다는 식으로, 바르뜨 자신이 그의 죽음에 대한 이런 텍스트를 보았다면 어떻게 분석을 했을까?

바르뜨가 프랑스대학의 교수직에 오른 것은 그의 나이가 매우 들어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형식에 맞추어 주를 단 논문들을 쓴 것이 별로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주 없는 글. 그의 죽음은 결국 주 없는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즐거움의 텍스트" 그것이었다.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6

티베트 도(道)의 실천 中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5. 4. 23:58

마르파는 아들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매우 감동했다 :

"아버지께서는 모든 게 환상이라고 항상 말씀하셨죠. 아버님의 아들이 죽는다면, 그것도 환상인가요?"

그러자 마르파는 이렇게 대답했다 :

"물론이지, 하지만 내 아들의 죽음은 최고의 환상이지."

 

-『티베트 도(道)의 실천』

 

 

 

롤랑바르트 '밝은 방-사진에 관한 노트' 서문

롤랑 바르트, "글을 쓴다는 것은.."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5. 4. 23:56

글을 쓴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새싹을 하나씩 나눠주는 일이다

 

- 롤랑 바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