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첫 번째 시련」 / 중얼중얼
posted by 얄롱얄롱 2013. 12. 3. 13:24

카프카의 첫 번째 시련

 

 

1. 땅에 발붙일 수 없는 예술가

예술가란 땅에 내려오지 못하고 낮이나 밤이나 그네 위에 머물러야 하는 곡예사 같은 존재다. 반면에 예술을 그저 취미로만 즐기거나 아니면 예술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들은 땅에 발붙여서 살아간다. 그들은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잠을 자러 우르르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는 와중에도 예술가는 그네 위에 홀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예술가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왜 즐거워하는지 또는 무엇 때문에 아파하는지 항상 지켜보아야하는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땅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없는 존재다.

 

2. 곡예사는 왜 울었을까

소설 속 곡예사는 삶과는 유리된 채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 세계에서 곡예사는 자신의 예술에만 전념한다. 하지만 곡예사는 자주 흥행주를 따라 공연을 하러 다녀야 했고, 땅으로 내려와 삶과 부딪혀야 하는 여행을 할 때 마다 고통을 느꼈다. 어느 날 곡예사는 여행 중에 흥행주에게 부탁을 한다. 이제 자신은 한 개의 그네만 타지 않겠다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그네를 가져야겠다고. 흥행주는 흔쾌히 두 개의 그네를 준비해 주겠다고 말을 한다. 그러자 곡예사는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그는 무엇 때문에 울음을 터트린 것일까?

천장 높은 곳에서 하나의 그네를 타는 것조차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힘든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동시에 두 개의 그네를 타는 것은 어떨까.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고 뼈를 깎는 고통을 인내해야만 할 것이다. 그럼에도 곡예사는 더 이상 한 개의 그네에 만족할 수 없었다. 이것은 예술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그의 성격 때문이다. 곡예사는 앞으로 자신이 겪어야 할 고통스러운 미래를 감지했던 것 같다. 자신은 두 개의 그네를 타야만 하고, 갖은 노력 끝에 두 개의 그네에 익숙해지더라도 그의 예술적 욕망은 세 개의 그네를 원할 것이다. 그네 타는 기술을 모두 익힌다 하더라도 곡예사는 그네에서 내려올 수 없다. 기술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 곡예사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절대로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을, 그네에서 영원히 내려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곡예사의 울음은 탄생의 울음이라고 할 수 있다. 태아가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크게 우는 것처럼 말이다. 태아는 출산 전 산모와 일체의 상태로 자란다. 곡예사가 한 개의 그네를 가지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았듯이. 태아는 성숙해지면 자궁을 뚫고 나오게 된다. 태아는 엄마의 산도를 따라 밀려 나오는데, 이때 태아는 온몸이 수축되기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던 태아에게 바깥세상의 충격은 엄청난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탄생은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성스럽거나 긍정적인 의미의 탄생이 아니다. 태아에게 탄생은 어쩌면 고통의 시작일 것이다. 자의적으로가 아니라 타의적으로 세상에 나와야하고 성장을 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곡예사 또한 그네 위에서의 삶을 자신의 의지로만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성격 때문에 그네를 타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고, 하나의 그네에는 만족할 수 없어 더 많은 그네를 타며 끝없는 성장을 해야만 한다. 이것을 처음 인식하게 된 곡예사는 태아처럼 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곡예사의 본심

그의 울음은 또한 복합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었다. 곡예사는 흥행주가 자신을 위해 그네를 준비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을 말려주길 바랐을 것이다. 한 개의 그네를 타는 것도 힘든 일이니 두 개의 그네는 생각도 하지 말라고 화를 내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흥행주는 곡예사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꼼짝없이 곡예사는 두 개의 그네를 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흥행주도 곡예사의 고통스런 앞날에 대해 알고 있었다. 곡예사가 그네 숫자를 계속 높이지는 않을지 그것이 곡예사의 존재를 위협하지는 않을지 걱정한다. 그리고 잠든 곡예사에게서 첫 주름살이 지기 시작한 것을 본다. 이 주름살은 곡예사가 예술의 완벽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처음 인식함을 뜻한다. 또한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기술을 연마하게 될 곡예사의 예술세계가 성숙해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주름은 관록의 상징이라고도 이야기하지 않는가. 자신이 완벽을 추구해야하는 예술가임을 인식하고 그 고통을 감내해내는 예술가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습관 때문에 예술을 추구하던 예술가 보다 한 차원 높은 예술가인 것이다.

 

 

"예술가의 역할이란?" 까뮈, <예술가와 그의 시대> /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3. 1. 22. 15:18

 

예술가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는 의문, 즉 ‘예술은 허위적 사치인가?’라는 의문을 풀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대답은, 결국 예술은 허위적 사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도형수들이 노를 젓고 선창에서 기진맥진하는 동안 노예선의 제일 뒤 갑판에 앉아서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들은 희생자들이 사자의 이빨 밑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동안, 이 곡예장 위에서 끊임없이 주고받는 세속적인 대화를 기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위대한 성공을 거둔 그 예술에 대하여 뭐라고 비난하기도 지극히 곤란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했으므로 여러 가지가 좀 변했고, 또 특히 도형수와 순난자(殉難者)들의 수가 지구 표면 위에 놀랍게 증가한 것입니다. 이 많은 비참 앞에서도 예술이 계속하여 하나의 사치가 되고자 한다면 오늘도 역시 하나의 허위를 승낙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술은 대체 무엇에 관해서 말하겠습니까? 만일 예술이 우리 사회의 대다수 사람이 요구하는 것에 순응한다면 예술은 무제한의 오락이 될 것입니다. 만일 예술이 맹목적으로 대다수 사람을 거부하고 자기의 꿈 속에 고립되기로 결심한다면, 하나의 거부밖에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오락인들의, 혹은 형태에 대한 문법가들의 생산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살아 있는 현실과는 단절된 예술에 귀착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중상을 입고 있는 가치는 분명히 자유의 가치입니다. 어느 훌륭한 정신의 소유자들(저는 지성에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지적 지성이요, 다른 하나는 어리석은 지성입니다.)은 자유의 가치는 참된 진보의 과정에서는 하나의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렇게도 장엄한 우매함이 야기될 수 있었던 것은, 백 년간 자본주의 사회가 자유를 극도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이용하였고, 그 자유를 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권리로서 간주하였고, 또 될 수 있는 한 번번이 자유의 원칙을, 사실을 억압하는 데 거침없이 이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회가 예술에게 자유의 도구가 되기를 요구하지 않고, 큰 효과 없는 훈련이나 단순한 여흥이 되기를 요구했다고 해도 전혀 놀랄 것이 못되지 않겠습니까?

- 까뮈, <예술가와 그의 시대> 중에서

 

 

 

비지식, 체험의 양식 위에서 전체를 보고하지 않는 작품으로서 가치 있는 작품은 없다. 전체란 완전히 인식되지 않은 채 체험된 것으로서의 사회적 과거와 역사적 제반 상황인 것이다. 그것은 개체는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객관적 구조들에 소속되어 있는 비의미 작용의 특수화로서만 나타날 수 있으며, 반대로 목표된 준의미 작용들은 그것들이 특수한 근원에 근거하여 체험된 것으로서만 구체적으로 나타날 때, 오직 그때만 사회의 객관적 구조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객관적 보편은 개체성에서 태어나 개체성을 부인하면서 보존하는 보편화의 노력의 지평선상에 있다.

그것은 한편에 있어서 작품은 그 시대 전체를, 즉 사회 내에서의 작가의 상황에 대답하여야 하며, 이러한 개체적 삽입에서 출발하여, 이 삽입이 작가를―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그의 존재 속에서 구체적으로 문제시하며, 그의 소리·사물화·욕구 불만·충족의 의심스런 토대 위에서의 고립의 부족 등의 형식하에 그의 삽입을 사는 존재로 만드는 것으로서 사회적 세계 전체에 대답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전체화 자체는 진행 중인 전체화의 단순한 계기로서 역사적으로 특수화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작가가 한 세계 내의 존재라는 형식하에 그의 세계 내 존재를 살지 않는 것, 즉 이 세계의 갈등들, 예를 들어 핵무장과 인민 전쟁 등 인류를 궁극적으로 파괴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사회주의에로 나아갈 가능성 등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무지와 무능력, 불안 상태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은 원자탄과 우주 탐험의 세계를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작가는 누구나 이 세계가 아닌 추상적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농담가나 협잡꾼일 뿐이다.

이 제반 상황 속에서 그 자신의 삽입을 보고하는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 매 페이지마다 이어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뇌가 폭탄의 존재를 드러내 주기만 하면 되지, 폭탄에 대해 말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반대로 전체화는 비지식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삶은 모든 것의 기초이며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것에 대한 궁극적 부정이다. 따라서 전체화는 수동적으로는 내재화되어지지 않으며 삶이라는 유일한 중요성의 관점에서 포착되는 것이다.

문학 작품의 기초를 이루는 양가성은 말로(Malraux)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 의해 잘 표명되고 있다.

“삶은 아무 가치가 없다. 그러나 어떠한 것도 삶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이 말은 무차별하게 각각의 삶을 생산하고 짓밟는 배후 세계의 관점과 죽음에 대항하여 자신을 투기하며 자신의 자율성 속에서 스스로를 확립시켜 가는 개체성의 관점을 결합시키고 있다. 작가의 참여는 공통 언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비정보 부분을 개발하여, 전달할 수 없는 것, 즉 체험된 세계 내 존재를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전체와 부분, 전체성과 전체화, 세계와 그의 작품의 의미로서의 세계 내 존재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는 데 있다.

그는 ‘그의 직업 자체 속에서’ 특수와 보편 사이의 갈등과 싸우고 있다. 다른 지식인들이 그들 직업의 보편주의적 요구들과 지배 계급의 특수주의적 요구들 사이의 갈등에서 그들의 기능이 생겨나는 것을 본 반면에, 작가는 그의 내적 작업 속에서 지평선상의 삶의 확인으로서의 보편화를 시사하면서 체험의 차원에 머물러야 하는 의무가 있음을 발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는 다른 지식인들처럼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지식인인 것이다. 정확히 이 이유 때문에 작품 그 자체가 이미 작가로 하여금 다른 지식인들이 서 있는 이론적·실용적 차원 위에 작품과는 떨어져서 위치하기를 요구한다. 왜냐 하면, 문학 작품은 한편으로 우리를 짓밟는 세계 속에 존재를 비지식의 차원 위에서 복원시키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삶이라고 하는 것을 절대적인 가치로서 체험적으로 확인시켜 주고, 다른 모든 자유들에 호소하는 하나의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중에서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읽고 / 중얼중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11. 13. 10:09

<유럽사회와 문화>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읽고

 

 

  그러니까 나는 제목에 완전히 낚였다. 이 책의 제목은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 아니라 지식인을 향한 독설이 되어야 맞을 거다. 작가는 이 책에서 당신은 진정한 지식인인가? 당신이 지식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지식인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지식인이 아니다라는 독설을 우리에게 퍼붓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은근하게 말하긴 했지만, 이 책의 제목은 명백한 반어다.

우리가 생각하는 지식인과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은 다르다. 일반적으로 지식인이라고 하면 가방 끈이 긴 사람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이란 지식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지식인이란 자기 자신 속에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 지배 이데올로기 사이에 벌어지는 대립을 깨닫고, 모든 권력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비판적 지식인이 우리나라에 몇이나 될까?

나는 책을 읽으면서 너무 놀랐다. 분명 이 책은 사르트르가 1965년에 한 강의 내용인데, 오늘 날 우리나라 사회를 너무나 잘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21세기를 미리 내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현재의 교육제도, 대학제도는 사르트르가 말한 그대로의 방법으로 지식인을 만들고 있다.

실천적인 지식인은 위로부터 모집된다.’ 맞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비추어보면, 대학은 기업이 원하는 인재들을 육성한다. 기업이 통계에 관한 전문가가 필요하다 하면 우리는 통계학을 필수교양으로 이수해야 한다. 돈이 되는 학문, 이공계통은 육성하고 케케묵은 인문학을 포기하도록 강요한다. 대학의 주인인 학생들에게 아주 쉽게 징계 처벌을 내리면서 사람이 미래다라는 뻔뻔한 광고를 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고객이 미래다겠지.) 그런데도 공부 좀 했다 하는 대학생들은 그런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상부구조의 관리가 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나는 전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밑줄을 팍팍 쳐가면서 책을 읽었다. 나는 밑줄 옆에 내 전 남자친구 이름을 적었다. (물론 나의 이름도 적었다.) 전 남자친구는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결코 그가 지식인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을 것이다. 그는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일 뿐이었다. 그는 휴머니스트였다. 인간은 평등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는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이라며 나에게 세상에 인문대학생만 남는다면 세계는 곧 멸망할 것이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게 해댔다. 참고로 그는 R.O.T.C.였다. 미군에 의한 베트남 침공을 진보,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하는 통에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그와 헤어졌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온전히 비판할 수 없다. 나 또한 그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도 어느 정도 중간층에 속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도움으로 대학을 와서 편하게 공부를 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럴싸한 직업을 얻어 중간계급에 속할 것이다. 창피한 일이지만 나는 이번 학기가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지 않았던가. 공무원 정도면 먹고 살 걱정은 없겠지. 시험에 통과해서 즐거워하는 나를 막연하게 상상하며……. 선생님께서 첫 수업 때 하신 말을 들으며 나는 혼자서 계속 웃었다. 정말로 노량진에서 슬리퍼 끌고 다닐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프티부르주아 계급에서 나오는 게 맞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정말 먹고 살기에 급급한 사람들은 깊게 공부하고 사고 할 여유가 없다. 이 책만 봐도 그렇다. 누가 이렇게 어려운 책을 읽겠어. 어느 정도 기본 지식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이 책을 소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굳이 이렇게 어렵게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것은 사르트르 고도의 전략이 아닌가 싶다. 지식인은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몸소 실천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과제가 아니었으면 나도 이 책을 꾸역꾸역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공부를 많이 했다고 지식인이 되는 것은 아니며, 이 어려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진짜 지식인이 되는 것도 아니란 것이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3장 때문이었다. 작가는 지식인인가? 나는 나의 위치가 어디쯤일까 궁금했다. 작가는 지식인이 맞겠지. 그럼 나도 지식인? 나는 제대로 뺨을 한 대 얻어맞았다. 결국엔 나는 지식인이 되려면 멀고도 멀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더라.

한때는 언어의 순수한 미만 다룬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것은 사회를 보려고 하지 않는, 사회문제를 볼 의지조차 없는 나의 비겁한 변명이었다. 내가 쓰는 언어가 이미 사회성을 가지고 있는데 순수한 언어의 미가 어디 있을까.

실제로 작가들이 늘어놓는 것들은 다 거짓말이다. 나는 대학에 와서 어떻게 하면 거짓말을 더 그럴싸하게 만들까 하는 방법들만 배웠다. 더 훌륭한 거짓말을 하기 위해 다른 거짓말쟁이들이 늘어놓는 것들을 읽고, 이 정도면 나도 훌륭한 거짓말쟁이지 하며 자위했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는 내내 죄책감이 들었다. 정작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아무 쓸모도 없는 일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작가란 관찰자’, ‘방관자. 그래서 작가는 비겁하다. 나는 내내 내가 비겁하다는 생각만 했다.

결국 나는 자기만족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다. 그나마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글을 쓰는 일이니까. 하지만 정말로 내가 자기만족 때문에 글을 썼다면 일기만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일기를 쓰지 않고 소설을 쓴다. 나는 누군가 내 소설을 읽어주길 바란다. 내 거짓말을 읽고 그 거짓말을 읽을 동안만큼은 그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 소설을 다 읽은 후에 그들이 내 거짓말에 공감하기를, 소설을 읽기 전과는 뭔가 변했다고 느끼기를 바란다.

작가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주 뛰어난 거짓말쟁이다. 하지만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거짓말이 진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글을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쓴다는 행위가 적극적인 사회참여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글을 한 자 한 자 적는데 큰 책임감을 느낀다. 물론 나는 아직 작가도 아니고 지식인도 아니지만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정말 허투루 공부하면 안 되겠다. 스스로에게 창피하지 않은 대학생이 되어야겠다.

 

 

* 참고문헌

장 폴 사르트르, 박정태 옮김, 지식인을 위한 변명, 이학사, 2011


지식인을 위한 변명

저자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출판사
이학사 | 2007-10-3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지식인의 종말이 다가온다?언제부터인가 전 세계적으로 지식인의 종...
가격비교

 

토마스 만,『토니오 크뢰거』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5. 5. 01:01

 

 

  • 그러나 비록 그가 닫혀진 덧창 앞에 외로이, 국외자의 신세가 되어 희망도 없이 서서는 상심한 나머지 마치 창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척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복했다. 왜냐하면 그때 그의 심장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왜냐하면 행복이란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자신에게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사랑받는 것, 그것은 허영심을 채우려는, 구역질나는 만족감에 다름아니다. 행복은 사랑하는 것이다.

 


  • 관능에 대한 구역질나는 증오와 순수성과 단정한 평화를 향한 갈구가 그를 사로잡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비밀스런 생산의 환희 속에서 준동하고 괴고 눈뜨는 상춘(常春)의 미지근하고도 들척지근하며 향기를 머금은 공기, 예술의 공기를 호흡해야 했다.

 

  •  <봄은 가장 추악한 계절입니다.>하고 말하면서 그는 카페로 가버렸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야 하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실은 봄에는 저 자신도 신경질적으로 됩니다. 저 자신도 봄이 일깨워주는 갖가지 추억과 감정의 아름다운 비속성 때문에 혼란에 빠진답니다. 단지 저는 그 때문에 감히 봄을 욕하고 능멸할 수가 없을 따름입니다. ……(중략)…… 예술가가 인간이 되고 느끼기 시작하면 그는 끝장입니다. 이것을 아달베르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카페로, 그런 <동떨어진 영역>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예, 바로 그겁니다!

 

 

  • 문학이란 것은 소명이 아니라, 일종의 저주다.

 

 

  • 이제 <언어>에 대해 말하자면, 이것이 인간을 구원해 준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감정을 차갑게 만들고 우리 인간의 마음을 얼음 위에 갖다 놓는 것이나 아닐까요? 농담이 아닙니다. 우리의 감정을 문학적 언어를 통해 신속하고도 피상적으로 처리해 버리는 데에는 그 어떤 얼음처럼 냉혹한, 분개할 만큼 외람된 행태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당신이 어떤 감미로운, 또는 숭고한 체험에 의해 너무나 큰 감동을 느꼈다고 칩시다. 더 이상 간단한 일이 없지요! 글쟁이한테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정리되어 나옵니다. 그는 당신을 위해 당신의 일을 분석하고 공식화하여 기존 개념으로 명명(命名)한 다음, 표현을 하고 일 자체가 저절로 말하도록 해줄 것이고, 그 모든 문제를 영원히 처리하여 아무 관심도 가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주고는 고맙다는 인사말조차 필요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할 것입니다. … 냉혹하고도 허영심에 찬 사기꾼…한번 말로 표현된 것은 이미 처리된 것이다.-이것이 그의(예술가)의 신조입니다. ……(중략)…… 고맙습니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이제는 안심하고 집으로 갈 수 있습니다. 나는 <처리되어> 버렸으니까요.

(대박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우리 예술가들은 누구보다도 딜레탕트를 가장 근원적으로 경멸합니다.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민음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