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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5.05 데카당스
  2. 2012.05.05 마르셸 바이어,『박쥐』 1
  3. 2012.05.05 유디트 헤르만,「소냐」
  4. 2012.05.05 하이데거의 피투성(被投性/Geworfenheit)
데카당스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5. 5. 00:56

데카당스 [ D、ecadance ]


쇠미(衰微) ·퇴폐 ·조락(凋落)을 의미하는 말.
원어명decadence



19세기 말엽 프랑스에서 일어난 문학상의 한 경향으로 예술 활동의 퇴조를 의미한다. 지성보다는 관능에 치중, 죄악과 퇴폐적인 것에 더 매력을 느껴 암흑과 문란 속에서 미를 찾으려 하였다. 프랑스의 보들레르·랭보·베를렌느, 영국의 오스카 와일드 등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문학에서는 원래 로마제국 말기의 병적인 문예의 특징을 가리켰으나, 19세기 말에 보들레르와 베를렌의 영향을 받은 모리스 드 블래시, 로랑다이아드, 로당바크, J.모레아스 등 상징파 시인들이 데카당(퇴폐파:1886∼89)이라고 자칭하여, 이후 그들의 예술적 경향을 데카당스라고 평하였다.

그들은 위스망스의 소설 《역로:? rebours》(1884)에 나오는 주인공의 생활신조를 의식적으로 실천하면서 평범한 부르주아 도덕이나 고전적 질서에서의 탈출을 시도하고, 진기하고 인공적인 것을 좋아하며 추악함 속에서 오히려 새로운 미(美)를 발견하는 등, 현실부정의 전위적인 문학활동을 하였다.



마르셸 바이어,『박쥐』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5. 5. 00:46

새벽녘의 정적을 가르며 목소리 하나가 터져 나온다.

"우선 안내 표지판을 세운다! 물렁한 땅을 골라 망치로 말뚝을 깊이 박아 넣는다! 있는 힘을 다해라! 표지판이 쓰러지면 안 된다!"

지휘관(여기서는 나치 친위대 또는 돌격대의 하급 직위로, 소집단의 통솔 책임자를 가리킴-역주)의 명령이 경기장에 울려 퍼진다. 완장을 두른 소년 몇 명이 지시에 따라 대열에서 달려나와 작업을 시작한다. 하나같이 귀 바로 위까지 깔끔하게 깎은 머리에 목 뒤를 면도해 짧은 털에선 윤이 난다. 참 짧게도 깎았다. 족보 있는 개들한테 하듯 꼬리나 귀 털을 잘라 다듬어 줄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완벽할 것이다. 요즘 노역에 동원되는 어린 소년들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휠체어가 다닐 수 있게 널빤지로 임시 도로를 만든다! 널빤지를 깔아 놓는 거다! 그렇게 해서 모든 장애자를 맨 앞줄까지 밀고 올 수 있게 한다! 비가 더 거세게 내려도 휠체어가 진창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한다!"

명령을 받고 있는 사람 외에는 꼼짝도 않고 서 있다. 축축하고 차가운 날씨지만 피로가 덜 깬 그림자들은 몸 한번 떨지 않고, 비에 젖은 갈색 제복 차림을 한 지휘관의 말 한마디 한마디와 일거수 일투족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여섯 명이서 널빤지 도로를 따라 석횟가루가 담긴 수레로 흰 선을 긋는다. 맹인을 인도해 주는 개들이 뒤로 물러선다. 선 사이 간격은 육십 센티미터. 사람 어깨 넓이 더하기 개 한 마리 넓이. 소름끼치게 정확하다.

지금은 전시(戰時)다.

 

  

마르셸 바이어,『박쥐』, 현암사

유디트 헤르만,「소냐」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5. 5. 00:45

그녀를 내 집과 아틀리에에 들어오게 하고, 식탁이나 서류 무더기 사이에 앉게 하고, 사진을 현상하거나 작은 스케치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소냐에게는 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난 몰랐다. 그녀는 그녀 방식대로 나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아주 경건한 마음으로 아틀리에에 들어섰고, 박물관 관람객처럼 경외심을 가지고 내 그림을 보았고, 식탁에 앉을 때는 마치 알현(謁見)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 당시 내게는 모든 것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녀가 내게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주관이 강하고 고집이 셌기 때문에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도 않았다. 나는 소냐가 내 삶에 갈고리처럼 걸려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밤들 동안 그녀는 작고 피곤한, 그리고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듯 자기만의 특이한 방법으로 말상대가 되어주는, 내 곁에 앉아 내 말에 귀 기울여주는, 내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는 기분을 갖게 해주는 아이였다.

 

(중략)

 

그 뒤에 일어난 모든 일은 불안 때문이었다. 나는 소냐를 두려워했다고 생각한다. 작고 특이한, 말이 없고, 나와 잠자리도 하지 않던, 나를 큰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만 보던,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어쩌면 내가 결국 사랑했을지 모를 아이와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삶의 가능성이 불안해졌다.

나는 소냐 없이 혼자 지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뜻밖에도 그녀가 내게 중요하다고 여겨졌고, 그녀가 보고 싶었다. 나는 그녀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마음을 졸였고, 한편으로는 영원히 멀리 사라졌으면 했다.

  

 

유디트 헤르만 『여름 별장, 그 후』中

「소냐」

하이데거의 피투성(被投性/Geworfenheit)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5. 5. 00:44

하이데거-피투성/기투

왜 나는 이런 세계에 살고 있는가

 

 

    소크라테스가 한 젊은이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질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전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질문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서 진리에 다다를 수가(의문을 제기할 수가)있을까?”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영혼이 천상의 이데아계에서 진리를 배웠지만 지상에서의 삶을 얻으면서 진리를 망각하게 되었으며, 그럼에도 진리를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대답했다(상기설).

    천상에 이데아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 우리 현대인에게, 소크라테스의 설명은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패러독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것일까.

    20세기 최대의 철학자 중 한 사람인 하이데거는 이런 패러독스에 답하는 형식으로 철학적으로 사색을 전개했다.

    하이데거는 1927년에 대표작인 『존재와 시간』을 발표했다. 책의 속표지에는 은사인 후설에게 바치는 헌사가 실려 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이 책은 하이데거가 후설을 비판한 책이다. 후설은 세계(대상)의 의미는 주관의 의식 속에 구성된 것이며, 그렇게 부여된 의미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인간의 의식 속에 이데아적인 영역이 확보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조작을 후설은 초월론적 환원이라고 불렀지만, 결국 의식 속에 이데아적인 것이 입력되어 있다고 생각한 후설의 사상은 충분한 근거가 결여되어 있다. 이런 설명은 이데아계가 소크라테스의 천상을 대신에서 의식 안으로 이동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 자체에 주목했다. 그리고 인간을, 후설의 경우처럼 세계(또는 그 의미)를 구성하는 순수의식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지도 만들지도 않은 세계에 자의(自意)와 상관없이 던져진 존재라고 지적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이런 상태를 하이데거는 ‘피투성(被投性/Geworfenheit)'이라 이름붙였다. 그리고 피투성은 기분(Stimmung), 그 중에서도 불안(Sorge)을 통해 자각된다. 예를 들면, 일상생활의 어느 순간 ‘왜 나는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을까’, 혹은 ‘머지않아 죽을 나에게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같은 불안을 내포한 물음은 누구에게나 살며시 다가온다. 그때 우리는 ‘왜 나는 여기에 존재하는가’라는 불안으로부터 자신이 이 세상에 던져졌고 여기에서 절대로 도망가지 못한다는 것(피투성)을 자각할 수밖에 없다.

    일단 피투성을 지각할 때, 인간은 언젠가 자신이 죽게 될 것이며 이 세계를 강제로 떠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죽음을 예리하게 의식하는 것을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선구적 각오성(覺悟性)’이라 불렀다. 이런 죽음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자신의 삶의 의미를 한번 포착해서 재구송하는 시도가 시작된다. 이런 시도는 ‘기투(企投/Entwurf)’라고 불린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세계 속에 자의와 상관없이 던져진 인간은 불안을 통해서 이런 상황을 지각하는 동시에 새로운 자신을 포착해내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작한다. 죽음의 자각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던져 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불안을 통해 피투성에 직면하지만, 역으로 이런 상황 때문에 최초로 존재와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여기서 처음의 소크라테서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앞서의 패러독스에 대해 하이데거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불안과 죽음의 자각을 통해서 진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답한 것이다.




출처 : Valis Deux 지음, 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사상,

개마고원 중 하이데거 부분 전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