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 폰 슈투크라트 바레, 『클럽 오아시스』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3. 12. 3. 15:05

 

 

 

  • 3년 전부터 은행 창구에는 절대로 가지 않는다. 행원이 내 딱한 자금 사정을 보면서 이마를 잔뜩 찌푸릴 게 두렵기 때문이다. 지갑이 비면 현금인출기를 찾아간다. (중략) 현금인출기는 참 좋다. 물론 그 기계도 내 자금 사정을 보여줄 수 있지만, 난 절대로 그 옵션을 선택하지 않는다. 항상 얼른 비밀번호를 눌러버린다.(p.62)

 

  • 내 몰골이 너무 초라하고 비참하다. 얇은 셔츠에 비친 불룩 튀어나온 배. 다른 사람들 보기에, 이건 정말 테러 수준이다. 스포츠센터 전단지에는 반나체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다. 빛나는 근육을 본 사람들로 하여금 부러운 생각이 들게 만들어 트레이너를 찾아가도록 꾀는 거다. 이게 다 섹스에 관련된 문제기 때문이다. 나도 당연히 그렇다. 하지만 그건 철저히 숨겨야 한다. (p73)

 

  • 눈곱만큼, 말 그대로 눈곱만큼이라도 돈을 버는 즉시, 은행에서는 대출 한도를 마구 늘려준다. 그러면 우리는 자본주의에 길들여지고, 머잖아 은행은 절대로 끝나지 않을 할부상환금을 들이밀며 우리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인다. 이제 일상은 채무 상담과 채무 상환을 위한 계획들로 도배된다. 어쩌면 배 째라.’ 하고 내빼는 게 삶의 콘셉트가 될 수도 있다. 결국 우린 돈을 쫓아 달리고, 은행은 우릴 뒤쫓아 달려온다. 그러나 그들에게 붙잡히면, 그걸로 끝이다. (pp.70~71)

 

  • 다이애나 빈이 죽었다. 그저 자동차 사고로 죽었을 뿐인데 그녀에 대한 신격화가 이뤄지고, 그녀는 곧 마음의 왕비가 됐다. 두 사람이 죽은 게 아무 상관이 없는데, 사람들은 마치 다이애나의 죽음이 뭔가를 바꿔놓기라도 한 것처럼 군다. 텔레비전을 보니, 수많은 사람이 그녀 영전에 꽃다발을 바치다가 졸도한다. 나는 구역질이 나는 걸 참아가며, 열두 시간 넘게 계속되는 장례식 생중계를 시청한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 여인은 단 한마디도 의미 있는 말을 남기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걸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날이 갈수록 다이애나는 위대해지고, 시신의 부패 정도가 심해지면서 경외의 수준도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변해간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혐의가 있는 시대적 현상이고, 특히 큰 잘못은 대중매체에 있다. 유리상자에 고이 모셔진 시체가 대중매체를 통해 소개되는 순간, 나머지 모든 문제들, 예를 들어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새로 제정된 법, 낡아빠진 법, 축구 관련 법, 연금 문제 따위는 모두 관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거다. (pp.251~253)

 

 

벤야민 폰 슈투크라트 바레, 송소민 옮김, 『클럽 오아시스』, 나비장책, 2008

밀란 쿤데라,『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3. 2. 3. 04:09

1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와중에 30만 흑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하게 죽어 갔어도 세상 면모가 바뀌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잔혹함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셈이다.

이 전쟁이 영원한 회귀를 통해 셀 수 없을 만큼 반복된다면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도 뭔가 달라질 수 있을까?

그렇다. 그 전쟁은 우뚝 솟아올라 영속되는 한 덩어리도 변할 것이고 그 전쟁의 부조리는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 영원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프랑스 역사의 자부심도 덜할 것이다. 그런데 역사는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 피투성이 세월조차도 그저 말뿐, 새털보다 가벼운 이론과 토론에 불과해서 누구에게도 겁을 주지 못한다. 역사 속에 단 한 번 등장하는 로베스피에르와, 영원히 등장을 반복하여 프랑스 사람의 머리를 자를 로베스피에르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영원한 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아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 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 두자. 다시 말해 세상사는, 세상사가 덧없는 것이라는 정상참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심판도 내릴 수 없다. 곧 사라지고 말 덧없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석양으로 오렌지 빛을 띤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

얼마 전 나는 기막힌 감정의 불꽃에 사로잡혔다. 나는 히틀러에 관한 책을 뒤적이다 사진 몇 장을 보곤 감격했다.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을 전쟁 통에서 보냈다. 내 가족 중 몇몇은 나치 수용소에서 죽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이, 되돌아갈 수 없는 내 인생의 한 시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해 줬던 히틀러의 사진에 비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러한 히틀러와의 화해는 영원한 회귀란 없다는 데 근거한 세계에 존재하는 고유하고 심각한 도덕적 변태를 보여 준다. 왜냐하면 이런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처음부터 용서되며, 따라서 모든 것이 냉소적으로 허용되기 때문이다.

 

 

2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기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das schwerste Gewicht)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가장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들어 땅바닥에 깔아 눕힌다. 그런데 유사 이래 모든 연애 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의 하중을 갈망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생명의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시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이것이 기원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가 제기했던 문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은 빛-어둠, 두꺼운 것-얇은 것, 뜨거운 것-찬 것, 존재-비존재와 같은 반대되는 것의 쌍으로 양분되어 있다. 그는 이 모순의 한쪽 극단은 긍정적이고 다른 쪽 극단은 부정적이라 생각했다. 이 이론은 모든 것을 긍정적인 것(선명한 것, 뜨거운 것, 가는 것, 존재하는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누는 극단적 이분법이 유치하게 느껴질 정도로 안이하게 보일 수도 있다. 단 이 경우는 예외다. 무엇이 긍정적인가? 묵직한 것인가 혹은 가벼운 것인가?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답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그의 말이 맞을까? 이것이 문제다.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

 

 

"예술가의 역할이란?" 까뮈, <예술가와 그의 시대> /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3. 1. 22. 15:18

 

예술가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는 의문, 즉 ‘예술은 허위적 사치인가?’라는 의문을 풀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대답은, 결국 예술은 허위적 사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도형수들이 노를 젓고 선창에서 기진맥진하는 동안 노예선의 제일 뒤 갑판에 앉아서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들은 희생자들이 사자의 이빨 밑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동안, 이 곡예장 위에서 끊임없이 주고받는 세속적인 대화를 기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위대한 성공을 거둔 그 예술에 대하여 뭐라고 비난하기도 지극히 곤란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했으므로 여러 가지가 좀 변했고, 또 특히 도형수와 순난자(殉難者)들의 수가 지구 표면 위에 놀랍게 증가한 것입니다. 이 많은 비참 앞에서도 예술이 계속하여 하나의 사치가 되고자 한다면 오늘도 역시 하나의 허위를 승낙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술은 대체 무엇에 관해서 말하겠습니까? 만일 예술이 우리 사회의 대다수 사람이 요구하는 것에 순응한다면 예술은 무제한의 오락이 될 것입니다. 만일 예술이 맹목적으로 대다수 사람을 거부하고 자기의 꿈 속에 고립되기로 결심한다면, 하나의 거부밖에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오락인들의, 혹은 형태에 대한 문법가들의 생산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살아 있는 현실과는 단절된 예술에 귀착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중상을 입고 있는 가치는 분명히 자유의 가치입니다. 어느 훌륭한 정신의 소유자들(저는 지성에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지적 지성이요, 다른 하나는 어리석은 지성입니다.)은 자유의 가치는 참된 진보의 과정에서는 하나의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렇게도 장엄한 우매함이 야기될 수 있었던 것은, 백 년간 자본주의 사회가 자유를 극도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이용하였고, 그 자유를 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권리로서 간주하였고, 또 될 수 있는 한 번번이 자유의 원칙을, 사실을 억압하는 데 거침없이 이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회가 예술에게 자유의 도구가 되기를 요구하지 않고, 큰 효과 없는 훈련이나 단순한 여흥이 되기를 요구했다고 해도 전혀 놀랄 것이 못되지 않겠습니까?

- 까뮈, <예술가와 그의 시대> 중에서

 

 

 

비지식, 체험의 양식 위에서 전체를 보고하지 않는 작품으로서 가치 있는 작품은 없다. 전체란 완전히 인식되지 않은 채 체험된 것으로서의 사회적 과거와 역사적 제반 상황인 것이다. 그것은 개체는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객관적 구조들에 소속되어 있는 비의미 작용의 특수화로서만 나타날 수 있으며, 반대로 목표된 준의미 작용들은 그것들이 특수한 근원에 근거하여 체험된 것으로서만 구체적으로 나타날 때, 오직 그때만 사회의 객관적 구조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객관적 보편은 개체성에서 태어나 개체성을 부인하면서 보존하는 보편화의 노력의 지평선상에 있다.

그것은 한편에 있어서 작품은 그 시대 전체를, 즉 사회 내에서의 작가의 상황에 대답하여야 하며, 이러한 개체적 삽입에서 출발하여, 이 삽입이 작가를―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그의 존재 속에서 구체적으로 문제시하며, 그의 소리·사물화·욕구 불만·충족의 의심스런 토대 위에서의 고립의 부족 등의 형식하에 그의 삽입을 사는 존재로 만드는 것으로서 사회적 세계 전체에 대답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전체화 자체는 진행 중인 전체화의 단순한 계기로서 역사적으로 특수화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작가가 한 세계 내의 존재라는 형식하에 그의 세계 내 존재를 살지 않는 것, 즉 이 세계의 갈등들, 예를 들어 핵무장과 인민 전쟁 등 인류를 궁극적으로 파괴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사회주의에로 나아갈 가능성 등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무지와 무능력, 불안 상태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은 원자탄과 우주 탐험의 세계를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작가는 누구나 이 세계가 아닌 추상적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농담가나 협잡꾼일 뿐이다.

이 제반 상황 속에서 그 자신의 삽입을 보고하는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 매 페이지마다 이어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뇌가 폭탄의 존재를 드러내 주기만 하면 되지, 폭탄에 대해 말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반대로 전체화는 비지식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삶은 모든 것의 기초이며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것에 대한 궁극적 부정이다. 따라서 전체화는 수동적으로는 내재화되어지지 않으며 삶이라는 유일한 중요성의 관점에서 포착되는 것이다.

문학 작품의 기초를 이루는 양가성은 말로(Malraux)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 의해 잘 표명되고 있다.

“삶은 아무 가치가 없다. 그러나 어떠한 것도 삶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이 말은 무차별하게 각각의 삶을 생산하고 짓밟는 배후 세계의 관점과 죽음에 대항하여 자신을 투기하며 자신의 자율성 속에서 스스로를 확립시켜 가는 개체성의 관점을 결합시키고 있다. 작가의 참여는 공통 언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비정보 부분을 개발하여, 전달할 수 없는 것, 즉 체험된 세계 내 존재를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전체와 부분, 전체성과 전체화, 세계와 그의 작품의 의미로서의 세계 내 존재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는 데 있다.

그는 ‘그의 직업 자체 속에서’ 특수와 보편 사이의 갈등과 싸우고 있다. 다른 지식인들이 그들 직업의 보편주의적 요구들과 지배 계급의 특수주의적 요구들 사이의 갈등에서 그들의 기능이 생겨나는 것을 본 반면에, 작가는 그의 내적 작업 속에서 지평선상의 삶의 확인으로서의 보편화를 시사하면서 체험의 차원에 머물러야 하는 의무가 있음을 발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는 다른 지식인들처럼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지식인인 것이다. 정확히 이 이유 때문에 작품 그 자체가 이미 작가로 하여금 다른 지식인들이 서 있는 이론적·실용적 차원 위에 작품과는 떨어져서 위치하기를 요구한다. 왜냐 하면, 문학 작품은 한편으로 우리를 짓밟는 세계 속에 존재를 비지식의 차원 위에서 복원시키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삶이라고 하는 것을 절대적인 가치로서 체험적으로 확인시켜 주고, 다른 모든 자유들에 호소하는 하나의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중에서

알베르 카뮈, 『이방인』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12. 11. 21:47

 

  • 나는 샘으로 향해 몇 걸음 나섰다. 아랍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래도 아직 내게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얼굴 위에 드리운 그늘 탓이었던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기다렸다. 뜨거운 햇볕에 뺨이 타는 듯했고 땀방울들이 눈썹 위에 고이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것은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특히 그날과 똑같이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대가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지끈 거렸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 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걸음, 다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은 채 단도를 뽑아서 태양빛에 비추며 나에게로 겨누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하자, 길쭉한 칼날이 되어 번쩍하면서 나의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눈썹에 맺혔던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려 미지근하고 두꺼운 막이 되어 눈두덩을 덮었다. 이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려서 나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앞으로 뻗어 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타는 듯한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그 타는 듯한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 왔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비 오듯 불을 쏟아붓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해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그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69~70)

 

  • 사제는 주위를 둘러보고 갑자기 지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모든 돌들은 고통의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압니다. 나는 이것들을 바라볼 때마다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 깊이, 당신들 중 가장 비참한 사람일지라도 이 돌들의 어둠으로부터 하느님의 얼굴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에게 보기를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 얼굴입니다.” 나는 좀 흥분했다. 나는 여러 달 전부터 그 벽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그 누구에 대해서도 나는 그보다 더 잘 알지는 못할 정도였다. 오래전에 나는 거기에서 하나의 얼굴을 찾아보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얼굴은 태양의 빛과 욕정의 불꽃을 담은 것이었다. 그것은 마리의 얼굴이었다.(131~132)

 

  • “아니, 당신 말을 나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도 다른 생애를 바란 적이 있었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자가 된다든지 헤엄을 빨리 칠 수 있게 된다든지 더 잘생긴 입을 가지게 되는 것을 바라는 것보다 더 중요할 게 없다고 나는 대답했다.(132) 

 

  • 그러나 그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 한 가치도 없어.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그에게는 없지 않느냐? 보기에는 내가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을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133~134)

 

  •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135)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이방인』, 민음사,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