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에 해당되는 글 63건

  1. 2012.09.20 천선영,『죽음을 살다』
  2. 2012.08.12 조지 오웰,『1984』
  3. 2012.07.10 구순충동
  4. 2012.06.27 제 2의 성
천선영,『죽음을 살다』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9. 20. 19:43

 

* 근대의 이상 구현을 방해하는 담지자로서의 죽음

 

  • ‘문화’는 인간의 구조적 유한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한계를 넘어 우리의 삶을 의미 있는 전체로 구성해낸 실로 ‘인류의 위대한 성취/업적’이다. 그런데 문화가 추구하는 지속성, 안정성, 그리고 초월성이라는 가치 확보는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의미의 원천적 불안정성에 대한 의식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억압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65)

 

  • “위생에 대한 근대의 집착”은 인간의 구조적 유한성이 개별적인 죽음의 원인들로 해체되는, 즉 이길 수 없는 죽음과의 전쟁이 특정한 질병들과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환원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66)

 

  •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어떤 것은 애초부터 아예 이 세상 어디에도 그를 위한 자리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바우만에 의하면 근대사회에서의 죽음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죽음은 완벽한 세계를 꿈꾸는 근대적 이상의 완벽한 타자, ‘공적(公敵) 1호’이다. 죽음은 우리의 일상세계와 안전하게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죽음의 원인과 위험적 요소들을 규정하고, 그들이 ‘건강한 핵심’에 미칠지도 모르는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특정한 사회적 공간을 규정하고 그들이 그곳에만 머무르도록 하고, 그들에 대한 지속적 감시, 관찰, 치료를 통해 그들을 ‘사회’로부터 고립시켜 내는 것이 중요하다. - '상징적 대체' (67)

 

  • 근대사회는 전염될 뿐만 아니라 치명적이라고 여겨지는 질병의 담지자(擔持者, Träger, Bearer)의 생산을 지속적으로 필요로 한다. 이러한 사회적 담론은 죽음에 어떤 특정한─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원인이 있다는 논의구조와 연결되어 있다. 죽음에 이유가 있다면, 그리고 그 이유가 더 이상 신의 뜻이나 악마의 장난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면, 그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전염의 우려가 있다고 여겨지는, 다른 이들을 상하게 했고 상하게 할 우려가 있는 사회의 ‘타자’(Das Andere)들을 끊임없이 찾아내야 하고, 찾아낸 이들은 분리/배제시켜야 한다. (‘부정한 것들’의 체계적 격리/배제는 흡연자들, 동성애자들, AIDS 환자들, 소수인종/외국인들을 둘러싼 사회적 담론, 논리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67~68)

 

  • 이제 우리가 만일 ─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의(과)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 죽는다면 아니 죽어야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내재적 유한성’ 때문이 아니라, ‘아직’ 특정 질병이나 상태를 치료할 약과 방법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죽음은 실존적 유한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적절하게 치료 또는 대응되지 못한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더 합당한 치료나 대응이 가능했던 내지는 가능해질) 질병이나 사고 때문으로 설명된다. 우리는 우리의 ‘때’가 다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다. 우리가 죽어야 하는 것은 의(과)학이 충분하게 발전되지 못했기 때문이며, 새로운 의학기술을 지불할 재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필연적 유한성은 피할 수 있는 그리고 통제가 가능한 (또는 가능해야 할) 여러 원인들도 해체된다. (106)

 

  •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체계들은 그들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사회 구성원의 죽음을 ‘총체적인 인간의 죽음’으로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보험회사에게 보험가입자의 사망은 보상해 주어야 할 ‘경제적 손실’을 의미할 뿐이고, 어떤 조직 내에서 구성원의 사망은 다른 구성원으로의 대체 필요성을 의미할 뿐이며, 병원에서 환자의 죽음은 자신들의 한계를 드러내는 치부일 뿐이다. (109)

 

  • “살기도 바쁜데, 언제 죽는 데까지 신경을 쓰겠는가.”

 

  • 오늘날 가족 구성원의 사망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다.

 

  • 죽음이 마치 전적으로 ‘노인들만의 문제’(Hahn 1968)인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없지 않다.

 

  • 사람들은 죽음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거의 무방비하다.

 

  • 근대인들이 죽음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無力感)은 합당한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정은 죽음이 근대사회의 구조상 근본적으로 소통 불가능(Bauman 1994)하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근대인들에게 사용가능한 언어, 상징체계는 도구적 성격을 지니는 ‘생존의 언어체계’뿐이다.

 

 

천선영, 『죽음을 살다』, 나남

조지 오웰,『1984』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8. 12. 09:41

 

 

  •  “…(중략) 만약 그 세력이 점점 불어나서 후세에 몇 마디의 기록이라도 남기게 된다면, 우리가 떠난 뒤에라도 다음 세대가 뭔가를 수행할 수 있을 거야.”

    “다음 세대에 대해서는 관심 없어요. 저는 지금 우리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을 뿐이에요.”

    “당신은 허리 아래쪽만 반역자군.”

    그의 재치 있는 말에 그녀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그를 껴안았다. (p.221)

 

 

  • 어떤 면에서 당의 세계관은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도 납득하지 못할뿐더러 현재 일어나고 있는 공적인 사건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가장 악랄한 현실 파괴도 서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무지로 인해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집어삼켜도 탈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곡식의 낱알이 소화되지 않은 채 새의 창자를 거쳐 그대로 나오는 경우처럼 뒤에 아무런 찌꺼기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p.222)


 

  • 그들은 심문으로 비밀을 알아낼 수 있고, 고문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을 끄집어낼 수 있다. 그런데 단순히 살아남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사는 게 목적이라면, 궁극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단 말인가? 사람들이 그들을 자신들과 똑같게 개조시킬 수 없듯 그들 또한 사람들의 감정을 변화시킬 수 없다. 설령 그들이 사람들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하나하나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하더라도, 인간의 속마음까지 공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속마음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신비로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pp.236~237)  

구순충동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7. 10. 15:37
라캉
충동과 욕망의 차이
손빠는 것
담배피는 것
제 2의 성 / 책갈피
posted by 얄롱얄롱 2012. 6. 27. 22:43
억압이 억압자에게 보증하는 이익 가운데 하나는 억압자들 중 가장 하찮은 자조차도 우월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24

26 평등원리